나는 세 아이의 어머니요, 한 남자의 아내로 지금은 주님의 품안에서 주님의 은혜로 주님께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42살의 가정주부이다.
일찍이 6.25동란으로 아버지를 잃는 슬픔을 겪었고 내가 다섯살 되던 해에는 어머니마저 재혼을 하시는 서러움을 경험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외할머니집에서 자라게 되었고 내 어린 마음 저 밑에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늘 자리잡았다. 어떻게 하면 엄마를 만날수 있을까? 하는 간절한 바램뿐이었다.
외할머니께서는 무척이나 인자하시고 정이 많으신 분으로 그분의 보살핌으로 71년에는 대학까지 마칠수 있었고 졸업한 그해 결혼하여 그 이듬해에는 첫 아들(바실리오)을 낳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 기쁨은 남편에게는 물론이요 외롭게 자란 나를 보는 외할머니께도 크나큰 축복 그 자체였다.
큰애는 튼튼하게 잘 자라 주었고 그리하여 나는 행복감 속에 시간의 흐름도 잊을 정도였다.
그런데 돐이 가까워지던 어느날 큰 애는 탈장(헤르니아)으로 우리 부부에게 뜻하지 않은 걱정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드디어는 B병원에서 수술을 받는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3시간 이상 걸리는 수술시간동안 나는 삶과 죽음을 오가는 상상을 몇번이고 해야만 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고 일주일후에는 퇴원을 했다.
퇴원후 얼마간 여유를 갖는가 싶더니 채 한달도 못되어 다시금 반대편으로 탈장이 되어 또수술을 받았다. 아이 엄마로서 살을 에이는 아픔을 또다시 경험했지만 실상 지내놓고 생각하니 그것은 잠깐 지나가는 바람같은 걱정에 불과한 것이었다.
예견지 못한 어두움이 그림자가 나를 엄습해 온것은 74년 둘째(바올리노)를 낳으면서 였다. 그누가 상상인들 했겠는가? 남편도 둘째 아들은 총명하게 생겼다며 여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둘째 역시 탈장이었다. 난 큰 아이때의 경험도 있고해서 일찌감치 양쪽 탈장 수술을 다 해버렸다. 이때가 백일을 조금 넘긴 때였다.
그런데 백일이 지나도 잘 놀고 열심히 움직이고 해야할 아이가 이상하게도 움직이기는 커녕 손가락 조차도 빨질 못했다. 이상한 느낌이 든 나는 바로 병원을 찾아갔다. 근심에 찬 내표정을 보시던 의사 선생님께선 발육이 늦어서 그런 것이니 걱정 말라며 이 다음에 커서 씩씩한 국군되고 아빠 된다며 웃었다.
나는 의사 선생님의 그 말만 믿고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진전되는 기색이 보이지 않자 주위의 권유로 사직동에 있는 K소아과를 찾았다. 그곳에서 내려진 진단결과는 「뇌성마비」라는 청천벽력의 판명이었다. 둘째에 대한 모든 기대는 산산조각 물거품이 되어 버렸으며 그 엄청난 고통의 현실만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있다.
증세도 최악의 상태로 완전히 식물 인간이 된 채손가락 하나도 마음대로 하지를 못하였다.
잠깐 일을 하다가 걱정이 되어 방에 들어가 보면 이미 베개에서 미끄러져 얼굴을 박고 있었고 고개를 들어 보면 얼굴과 베개는 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때마다 안타까운 현실앞에서 한없이 울곤 하였다.할수없이 나는 큰애를 친정에 맡기고 용하다는 한의사와 침술원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였는데 안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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