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낮게 산허리를 감고 도는 날, 이런 날에 우리집은 마치 소설 속에 나오는 성(城)처럼 운치가 있다.
군위군 부계면 산중턱, 우리집이 있는 곳이다.
이곳엔 길거리에서 신문을 팔거나 구걸(자기들 은어로는「꼬지」)을 하는 10세~17세까지의 청소년들을 수용하여 숙식과 교육을 시키는 교호시설이다. 직원은 원장 수녀님을 비롯하여 9명, 작년 9월 17일 개원할 당시엔 14명이었던 아동이 고동안 들쑥날쑥하면서 27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에게 오전에는 학과 공부를 지도하고 오후에는 목공예 기술을 습득시킨다. 그러나 우리집 아이들의 혈관 속에는 집시의 피가 흐르지 않나 하고 의구심이 날 정도로 방랑벽이 있다. 한곳에 정착해 사는데 있어 못견뎌하고 매우 갑갑해한다. 그들에겐 길거리에서 신문을 팔거나 꼬지를-나도 이젠 이들의 은어가 예사롭게 나온다-하는 일이 조금도 수치스럽다거나 어색하지 않은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이런 일들을 낭만과 함께 즐기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애들에게는 정상적인 가정이나, 규율 속의 학교 학생들에게는 볼수 없는 멋있는 부분들이 있다. 마음의 자유랄까, 개방성 내지는 세상에 대해 두려움을 모르는 활달함을 볼수 있다.
우리 아이들은 부모가 안계시는 쪽보다 부모가 계시긴 하되 결손 가정이라든가 계부ㆍ계모 슬하, 또는 부모가 이혼하여 재혼함으로써 어디로든 오갈데가 없는 아동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을 보면서 어른들의 잘못의 댓가를 아이들이 치루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금치 못한다. 이런 잘못된 가정에서 파편처럼 아이들은 거리로 튀어 나온다. 길거리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이들을 한곳에 점착시켜 교육한다는 것이 짐작처럼 수월한 노릇이 아니다. 아이들의 멀쩡한 겉모습만 보고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렇게 사랑해 주고 감싸주면 되겠지, 아니면 엄격하게 다스리면 되겠지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이들을 접했다간 불시에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는 사건을 치루기가 일쑤이다. 어떤 땐 참으로 암담하고 부아가 치밀어 올라, 마치 하느님이 이 일을 나에게 시키기나 한 것처럼 항변이 나온다. 「하느님, 왜 내가 이 아이들을 맡아야 합니까? 자기부모들도 버린 애들을…」. 그러나 항변의 끝은 언제나 개꼬리 감추듯 힘이 없어진다. 이 애들의 처지와 그들의 현실적인 암담함이 더 큰 바위되어 느껴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골머리 아픈 일도 있지만 꽤 낭만적이고 멋있는 부분들도 없진 않다. 지난 성탄절날, 인근 주민들도 놀라도록 멋지게 해낸 성탄연극, 1년도 채 안되어 국민학교 검정고시 합격, 냇가 옆 산 위에 줄을 메어 놓고 바위를 기어오르던 암벽타기, 가호리(佳湖里)란 이름처럼 아름다운 호수가 멀지않은 부근에 있고, 산중턱에 자리한 우리집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랫마을은 방금 낯을 씻고 나온 촌색시마냥 늘 맑고 풋풋하다.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대기 덕분이다.
아침이면 산안개가 우유 빛으로 온집을 감싼다. 그안개 속으로 우린 아침마다 코스모스, 들국화… 그리고 이름모를 갈꽃이 피어있는 들길을 뜀박질한다. 들판에 누런 벼이삭이 출렁거리고, 산능금을 키우는 과수원엔 팔을 뻗으면 곧닿을 듯한 높이에 빨갛게 능금이 달려있다. 점심을 먹고 휴식시간에 아랫마을로 잠깐 산책을 나가면 능금을 따던 농부들이 스스럼없이 사과 두어알을 인심 좋게 건네준다. 빨간 능금을 흐르는 맑은 시냇물에 씻어 그대로 한입 베어 먹으면, 도회에 찌들은 내 마음의 창살이 하나 둘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같다.
가을 바람이 부는 날, 아이들은 바람을 맞으며 들판으로 달려나가 들꽃을 한아름 꺾어와 마치 기사나된 듯 우리에게 갖다 바친다. 아이들 속에 들려져 있던 들꽃들이 흔들거리며 우리들 가슴에 안길 때, 우린 마치 여왕이나 된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큰 그쁨은 삭막한 그들 가슴에 남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예쁜 기쁨이 꽃처럼 피어나는 것을 보는 일이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우리가 이런 여유를 즐기도록 마냥 내버려 두지는 않는다. 그들은 심심찮게 말썽을 피운다. 탈원을 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온종일 산과 들을 헤매며 찾게 한다든지, 아니면 이와 유사한 사건을 일으켜 우리를 실컷 골탕먹이고도 절대로 미안해 하지 않는 아이들, 상식적으로 볼 때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그들, 금방 된통 혼이 나고도 다시 시작하는 그들을 대하면서 처음에는 어리둥절하고 놀라기도 했지만, 이젠 그들을 견디고 기다리는 인내심만이 산만큼(?) 커진다.
절대로 되돌아 올 것을 기대하지 않고 순수하게 빈 마음으로 사랑을 주어야 함을 깨닫고, 어른들에게 버림받은 그들의 상처입은 마음을 이해해야 하고 그들의 비뚤어진 마음이 결코 그들의 탓이 아닌 우리 어른들의 탓임을 알 때 쉽사리 아이들을 원망하거나 나무랄 수 없음을 알아 간다.
한달에 두 번 있는 귀한 외출에서 돌아오는 귀로길에서 바라다 보이는 우리집은 어느 외국 산속에 있는 성처럼 또는 별장처럼 근사하게 보인다. 파란산속에 빨간 벽돌 3층집파란 지붕, 건물 외형도 알프스산의 집처럼 멋지게 지어져 있다. 식당에 있는 대형 유리창엔 산이 하나 가득 들어와 있어 한폭의 살아있는 하느님의 풍경화가 되고, 저녁이면 붉은 노을이 유리창 가득 들어차 수시로 변하는 노을빛을 보노라면 잠시 먹는 것도 잊곤 하지만, 이런 것도 아랑곳없이 열심히 먹어대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헛웃음이 나온다.
한편 생각하면 내가 즐기고 있는 이 여유로움이 죄스럽기조차 하다. 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얼마나 섭섭한 노릇인가. 부모가 없거나 있으되 함께 살지 못하고 그 부모에게 버림받은 가슴 아픈 상처, 생계를 자신의 손으로 해결해야 했던 지난날의 차가운 현실, 이런 암담함 등을 나는 겪어보지 않아 십분의 일도 짐작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그나마 숙식이 해결되고, 공부를 하고 있지만 수시로 찾아오는 자신의 실존에 대한 회의를 철들은 아이들이 겪는 것을 곁에서 본다. 자기가 살아야 할 의미, 존재가치를 상실한 말을 가끔 할 땐 가슴 떨림과 함께 짙어오는 마음의 어두움, 이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꿈을 심어 주고 싶지만, 그들에게 들려주는 말들이 공허하게 자신에게 느껴질 때 나도 모르게 여기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 아이들의 말처럼 그들 실존의 발밑이 흔들림을 함께 느낀다. 누가 이들에게 이런 외로움을 주었는가. 이 아이들은 왜 그렇게 불행한 가정에 태어나야 했던가? 하는 질문이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다. 그들이 그런 부모를 만난것이 그들의 의지가 아니듯 행복한 가정에 좋은 부모밑에 태어난 아이들도 그들의 선택이 아니질 않는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는 그들에게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가? 하느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는가? 하는 것의 해답이 나온다. 거리에서 껌을 팔고, 신문을 팔고, 때로는 남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는 청소년들을 경원시하고 사회악으로 매도하기만 할것인가. 이들을 사회에 내몰은 것은 일차적으로 그들 부모의 책임이 있지만 나의 책임도 일말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회 공동체적 입장에서.
내가 많이 가짐으로써, 내 이웃의 아픔을 외면했기에, 그들 가정이 파탄에 이르고, 아이들이 불행한 처지에 빠졌다고 생각할 수 없겠는가.
이 아이들은 습성처럼 누구의 도움을 받고도 쉽사리 고마워하지 않는다. 이것의 근원은 어른들에 대한 불신과 반감에서 나온다.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자신들의 부모ㆍ친척에게 버림받은 아픈 기억이 있다. 그러니 어느 누구에게 진정한 사랑을 기대하고, 그 사랑을 믿겠는가.
끊임없이 주기를 요구하고, 받고도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듯한 그들을 보면서, 때론 야속하고 섭섭함을 금치 못하지만, 하루에도 몇번을 그들의 입장을 되살펴 보는 작업을 한다. 참으로 이 아이들의 불행이 그들 자신의 탓이 아니며,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 부모의 탓도 아닌 사회의 구조적인 잘못에서 파생된 것임을 알 때, 사회 구성원의 하나인 나의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진정 생색내지 않는 무조건적인 순수한 사랑을 주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 못한 자신을 본다. 때묻은 자신, 세속적인 계산을 하는 자신, 생속인 좁은 가슴 때문에 사랑에 굶주린 그들을 푸근히 품어주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기대처럼 잘 살아주지 않고, 그릇된 심성이 바르게 돌아오지 않는다고 탓할 수 있는가. 자기 또래의 다른 청소년들이 그러하듯이, 이들도 똑같이 보호받고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 그들 부모가 그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면, 그들은 누구에게서든 그 시기에 받아야 할 혜택을 누릴 권리가 있지 않겠는가. 내 자식이 나의 예속물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면 그들 또한 그런 축복 속에 태어난 생명이지 않는가. 그러한 그들이 그렇지 못한 상태에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어른인 우리 자신의 탓이 아니겠는가.
톨스토이 원작「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을 자주 떠올리게 하는 아이들, 이런 시설에서 흔히 있듯, 탈원ㆍ귀원을 되풀이하며 들락거리는 아이들이지만, 이제 어느정도 자리를 잡은 몇몇 신통한 녀석들, 올 10월에 있을 목공예 전시회를 위해 자기 작품을 제법 그럴듯하게 만들어 내는 솜씨를 보노라면, 그들의 부모들은 그들을 버렸지만 하느님은 거두어 보살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파란 가을 하늘에 우리집 지붕이 풍덩 빠진 것같은 마당에서, 아이들은 갈바람 속에서 고추잠자리처럼 연을 날린다. 마치 추락한 자신들의 꿈을 실에 꿰어 높이높이 띄워 올리듯, 하늘 높이 연을 날린다.
그들의 꿈과 희망이 이사회에서 현실적인 모습으로 구체화되고 꽃피기를 기다리는 마음, 이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알고, 참으로 나의 책임임을 느낄 줄 아는 내 이웃들의 따뜻한 마음을 기대하는 심정으로 나도 함께 마음의 연을 날려 올린다. 저 하늘 높은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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