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나 자신인 것이 눈물나도록 고맙고 감사롭다. 그럴때 마다『주님, 내가 나자신임을 감사하게 여길 수 있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를 드린다.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찾아 주시는 그분을 순간순간 체험하며 살고 있는 나는 정녕 은혜로운 삶을 살고 있는게 아닐까.
특별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나」라는 인간을 만들어 주셨고 그분을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고 나는 그것을 확실히 믿으며 내 모든 것에 함께 하심을 체험하며 역시 특별한 것이 없는듯 살고 있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그분에의 체험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같이 계신다는 사실보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 견디기 어려울 때 나를 떠나지 않고 내 고통과 눈물까지도 함께 하며 계신다는 믿음은 갖고 있는 일이다. 먹는 순간에도『주님 이렇게 먹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먹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함께 해 주십시오. 그래서 그들의 배고픔을 채워주십시오. 고통의 순간에도 주신 고통으로 당신과 더욱 함께하게 하소서. 다른 고통받는 이에게도 함께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 생각, 느낌, 본능적이고 생리적인 모든 것까지도 나는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의 섭리하심으로 받아들이며, 그렇게 하지 못하는 다른이들을 위하여도 기도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 놀라운 은총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내게 있어서 그분은 누구이고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과연 그분에게 있어서 무엇인가.
언제나 감사로움과 은혜로움으로만 그분 앞에 섰던가. 인간적인 극심한 고통과 절망과 좌절과 무관심, 냉대 속에서 괴로워할 때, 잠시라도 그분을 회의하고 주저한 적이 없고, 내 존재의 가치를 의심하고 그분의 권능과 은혜로움을 의심해본 일은 없는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않을 인간의 욕심을 내뜻대로 채워주지 않는다고 원망한 일은 없었던가. 온통 부끄러움 투성이고, 잘못 투성이지만, 고통주신 것을 감사히 여기고 받아들이게끔 당신과 함께 해 주시고, 살게해 주시고, 느끼게 해 주신 사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축복 속에 산다고 말하고 싶다.
누구나 즐거움과 기쁨을 주셨을 때는 감사드리기 쉽지만 고통과 절망의 처지에서 감사드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역시 그분이 주신 깨달음이요 은총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가끔 내가 체험한 그분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할까에 인간적인 주저를 느끼곤 한다. 잘못 들으면 유독 나만 선택된 인간으로 은총 받은 것을 과시하거나 자랑하게 되는 인간적 교만에 빠지지 않을까 두렵고 겁나기도 하고, 그냥 가만히 있기엔 그분의 큰 권능과 선하심을 나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셨다면 나는 오직 도구일 뿐인데 도구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또 다른 교만에 빠지게 될 것 같아 혼돈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분명히 믿고 있다. 나를 이렇게 살게 해주신 분은 그분이고 나는 그것을 믿으며 체험했으니 하잘 것 없는 인간 하나에게도 당신은 선하신 구원의 손길을 보내신다는 것을 드러내야 하는게 진정 그분이 원하시는 일임을.
그렇다고 나의 하루삶이나 사는 것이 남보다 다른 것이 있는건 절대로 아니다. 내가 남보다 낫고, 잘나서、선택되어서가 아니라 못나고, 볼품없고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음에, 나는 그 평범한 일상이 고맙고 은혜로워 당신의 축복인 것을 눈물 흘리며 주신대로 받아 살고 있을 뿐이다.
또한 내게 주신 모든 것 너무나 신기하고 새롭게 느껴지기만 해서 그분의 놀라우신 은총에 가슴 떨림을 느끼곤 한다. 나는 지금 그분을 느끼며 감사드리며 살아있는 일이 기쁘다. 나자신을 사랑하며 타인을 사랑하며 살도록 시간을 허락하여 주신 그분을 사랑한다.
나는 남들이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암이란 이름을 가진 환자이다. 스스로 깜짝깜짝 놀랄만큼 두렵고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을 해야하고, 자기자신과의 피나는 싸움을 벌이며 오늘을 살고 있는 시한부인생인 셈이다.
나는 지금부터 3년전인 1987년 3월 18일「팽대부 악성종양」이란 드문 이름의 병명으로 장장 10여시간 가까운 긴 수술을 받았다. 십이지장을 적출해 내고 위장일부 췌장일부 담관일부를 잘라내는 휘플씨 수술이란 것으로 종양제거 수술로서는 상당히 어려운 수술이었다는건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아픔을 느끼지는 1개월정도, 병원에 다닌지 18일 입원한지 12일째에 수술을 할만큼, 환자의 상태는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있었고, 정확한 병명을 찾기까지(병명이 세번이나 바뀌었다) 무수한 검사로 시달리고 지친 상태였는데도 정작 환자인 내마음은 평온하고 담담했다. 수술받기 전에, 내가 암으로 진단이 내려진 사실도 알았고,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는 분위기까지 심각함을 감지하고 있었는데도 전혀 불안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나들이라도 가는 심정으로 수술실에 실려 들어갔으니,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하고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머리 속이 텅빈 것 같은 진공상태였다고나 할까. 의료진이 하는대로 맡기고 따르는 일 뿐이었고 주어진대로 겪고 치러야한다는 당연한 사실로 여겨졌으니 모든 것은 그분이 선하신 손길로 어루만져 주신 까닭이었음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수술받기 전날 내게 있어서는 은혜롭다 할 일이 몇가지 있었다.
내가 속한 레지오단원들이 루르드의 기적수를 가져와 기도를 같이 한 후에 마시게 했다. 그때 내마음은 기적을 바라는 것 보다, 기적수를 마신다는 사실보다, 그것을 가져와서 내게 마시게 할만큼 나를 위해 걱정을 아끼지 않는 마음에 대한 고마움과、감사로 뜨거워 있었고 확고한 믿음에 대한 새로운 신뢰가 생겨남을 느꼈다. 내가 무엇이길래 하찮은 나를 위해서 이렇게 사랑을 나누고 있는가, 매일같이 찾아와 기도해주고 위로의 말을 들려주는 행위는 주님의 사랑을 나누고 전하는 도구인것만 같았다.
또 한가지는 성령기도회를 이끄시는 신부께 성령안수기도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내게 그분의 안수(치유)기도를 받게 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가진 몇몇 자매님들이 줄곧 기도하며 병원문안으로 들어섰을 때 마침 승강기 앞에서 계신 그 신부님을 만났다고 했다. 펄쩍 뛰다싶이 감사한 마음으로 다른 볼일로 오신 그분을 바로 내병실로 모시고 왔다고 했다.
조용하게 아주 편안하게 나직하고 신뢰가득한 모습으로 기도를 해주시고 걱정하지 말라고 가신 후、너무나 기뻐하며 감사해 하는 자매님들을 보니 나도 덩달아 참 좋아졌고 감사로워 졌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방언기도도 안수기도다 하는 것들에 약간의 거부감을 갖고 있었고 별나게도(?) 믿는다고 치부하고 있는 열리지 못한 마음의 신자였기에 그저 그러려니 덤덤히 받아 들였는데 나보다 더 기뻐하며 확신에 찬 모습으로、구할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열심한 마음으로 구하고자하는 그 모습에서 굳은 믿음과 열린 세계를 볼 수 있었으니 새로운 눈뜸(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인 나에게는 신선하고도 강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꺼져가는 작은 생명하나를 위해 절실하게 구하고 기도하고 매달리는 그 믿음이야말로 바로 나에게 든든한 그분의 손길이 곁에 있음을 느끼게 하고 확신하게 하는 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 후 아주 헤어나기 힘든 때 나는 그 신부님을 찾아가 한번 더 치유기도를 받았고 성령세미나를 거쳐 성령기도회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또 그날 오후에 본당신부님께서 오셔서 총고백을 받아 주셨고 병자성사를 주셨다. 한시간이 넘도록 참을성을 가지고 친절하게 내고백을 들어주신던 신부님, 아버지 주님을 뵙고 앉은 것처럼 따스하고 포근했다. 죽음을 앞두고가 아니면 도저히 말할수 없을(이미 주님께선 환히 알고 계시겠지만) 잘못들과 부끄러움, 회한과 저주들을 낱낱이 드러내고 나니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죽음 앞에서 용서하지 못할 것이 있을건인가.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마음을 용서하고 싶었고 용서받지 못하리라는 자기자신을 용서할 수가 있었다. 잘못 생각하고 잘못 살아오고, 잘못을 저지른 많은 나날들과 자신을, 그분께선 다 용서하셨으리라는 마음이 들었다. 가지고 가야할 가슴도 없었다. 온전히 텅빈 의식상태, 자신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텅빈 평온한 상태였다. 진정 그분의 손길로 깨끗해진 축복의 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 깨끗한 상태 속에 놓여있었던 자신이 은혜롭게 느껴지고 그리워지기까지 한다. 도저히 내 힘이 아닌 강한 그분의 치유의 손길이 나를 쓰다듬어 주셨던 게 분명하다. 그날 나는 웃으며 침대로 돌아와 누울 수 있었고, 두려움없이 수술 전날밤을 보낼 수 있었다. 코에 호스를 넣어 3천cc의 증류수로 위장내용물을 세척해 낼 때도, 농담을 주고 받고 할 만큼 나는 강해져 있었다.
87년 3월 18일 수요일 새벽6시, 꿈에서 깨었다. 주치의 선생님이 오셔서 내배위(종양이 생긴부위)에 손을 얹어 보더니 아무 걱정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분이 흰옷을 입은 주님으로 변하셨다. 주님의 손길은 따뜻했다.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잠이 깼고 오른쪽 복부위엔 아직도 그분의 손이 따뜻하게 놓여 있는 것 같았다. 꿈인것 같지 않았다. 그러면서 무엇인가 가슴을 탁 때리고 지니가는 것 같았다. 확연히 말로는 나타낼 수 없는 어떤 느낌이었다.
완고한 마음ㆍ잘난척히고 남을 비판했던 내 마음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고, 내「잣대」로만 남을 재고 판단하던 어리석음과 긍정적으로 순수하게 수용하지 못했던 두꺼운 부분이 한겹 벗겨진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 그때 주님은 분명 내눈과 가슴을 뚫고 내게 오신 것이 틀림없었는 것 같다.
꿈을 꾸고 나니 39도를 오르내리던 열이 정상체온으로 떨어져 내렸고 부지런히 열을 체크하던 의료진들도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수술이 미루어지지 않고 예정대로 진행될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수술하던 날은 마침 수요일이었다. 본당에서는 10시 낮미사를 나를 위해 봉헌한다고 했다. 고맙고 감사했다. 내가 무엇이기에, 나를 위해 미사까지 봉헌해 준단말인가. 지금은 나보다도 남들이 더 나를 위해 기도를 바치고 애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진정 나보다도 남들이 나를 더 사랑하고 있었다. 내 사는데 바빠 난 돌아볼 여유도 없이 살아온 마음과 태도가 너무나 부끄러워졌다.
나만치 힘든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사람이 누가 또 있을까하며 고통에 교만해져 있었기에 남의 고통과 아픔은 별 것 아니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버리고, 절망하고 괴로워하며 살아온 지난날이 너무나 후회스럽고 부끄러워졌다.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살아버린 나날들, 자신을 미워하며 자기삶의 형태를 증오하며 어쩌지 못해 살아온 잘못된 세월이 부끄러웠다.
그런데 다른이들은 어떤가. 이렇듯 부잘 것 없고 별 가치도 없는 나를 위해 미사를 봉헌하고 아침저녁으로 기도해 주고 찾아와 위로해 주고 손잡고 눈물을 흘리며 사랑을 보여주고 나누어주고 있지 않은가. 내가 과연 살(살아야할) 가치가 있는가 하고 되물으며 나를 학대해온 내게 그 이상의 주님의 모습을 어디에서 찾고 만날 수가 있단말인가.
나는 아직도 굳게 믿고 있다. 믿는 이들의 기도는 앓는 이를 낫게 한다는 것을.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게 믿을 것이며 나를 통해서 그것을 드러내고 증거하여 남들도 믿게 하고 싶다.
내가 이렇듯 주님을 체험하며 새로운 나날을 살고 있음은 다른 모든 믿는 이들의 기도 덕분임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 그래서 무너져 내릴 정도로 고통스럽고 힘겹고 짜증과 미움과 절망이 뒤범벅이 되어 나를 괴롭힐 때 나는 이렇게 살아라고 모든 이들이 나를 위해 눈물흘리며 기도해주지는 않았을텐데. 그 모든 분들의 기도를 헛되이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선 기쁨으로 살아야지. 이래서야 되는가, 『주님 용서하십시오. 믿는이들을 통해 내게 주신 당신 치유의 은총을 당신을 증거하고 드러내며 사랑하며 사는데 쓰도록 해주십시오』라는 간절한 통회로 돌아오게끔 해주는 원천, 삶의 기둥이 되어주고 있다.
죽음과의 갈림길에 놓인채 중환자실에 눕게 되었다. 고통은 너무나 극심했다. 수술받기 전의 편안하던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내겐 오직 고통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나 비참하고 극심한 아픔만이 계속되어 지옥에 있는 것 같았다. 살아있는 것이 두려웠다. 차라리 그냥 죽게 내버려 두었더라면 나을성 싶은 순간이었다.
처절한 육신의 고통 앞에서 기도도 나오지 않았고 짐승 같은 신음과 비명만이 기도의 전부였다. 나약한 인간의 동물적인 고통만이 전부였다. 수천길 깜깜한 벼랑 속으로 거꾸로 쳐박혀 떨어져 내리는 느낌으로 허우적거리고 발버둥질쳤다.
고름이 채여 불룩하게 배가 솟아올랐고, 허파는 사진에 반도 잡히지 않게 물이 차서 주사대롱으로 물을 빼내기도 하는 온갖 합병증과 후유증으로 소생가망이 희박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코에 하나 배에 세개의 호스를 꿰고 양팔에 각 하나씩의 링겔호스, 배뇨기의 호스까지 합쳐 일곱개의 호스를 주렁주렁 꿴채 장유착 방지를 위해 걸어야하는 일도 고문이고 형별이었다.
중환자실 중앙에 예수님의 십자고상이 모셔져 있었다. 가물가물하는 정신 속에서도 눈만 뜨면 바로 바라보이는는 고상. 나는 그저 주님의 고상을 쳐다보고 바라보기만 했었다. 중환자실의 온갖 물건들이 온통 끔찍하고 괴상한 헛것으로 보여 도리질치며 소리지르다가도 고상을 보아야겠다는 의식으로 눈길을 그곳에 맞추면 헛것들의 형상은 사라졌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 병실로 옮겨졌다. 합병증과 후유증의 상태는 약간 호전되는것 같았으나 지친 마음은 견디어낼 힘을 잃고 있었다. 잠을 전혀 잘 수가 없었고, 아픔을 참을 수가 없었다. 위로해 주러 오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싫어졌다. 왜 나만 이렇게 죽어가고 있어야하고 고통받아야 하는가. 저들보다 더 많은 죄를 지은 죄의 대가로 이렇게 죽어가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들 뿐이었다.
많은 분들이 기도와 위로의 말을 들려주었지만, 가슴에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특히 가슴에 상처를 주는 것은 섣부른 상투적인 위로의 언사였다.
이 세상에서의 온갖 좋은 것들은 주님의 상급이고 고통、질병 등은 죄의 벌이라는 내용이 암시적으로 담긴 위로의 말을 들을때면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만큼 많은 고통 속에서 살아왔고 또 이런 고통을 받아야하는 나는 그럼 무엇인가?
더러는 고통은 더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주신다는 위로의 말도 해주었지만 더욱 모난 마음만 될 뿐이었다.『더 사랑받는 것 다 좋으니까 당신네들이나 고통 많이 달라고 하시오』그런 심정이 되었다. 얼마나 가소롭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던가, 그런 나를 주님께서는 조용히 어루만지며 아무말없이 함께하시고 지켜주고 계셨던 것이다.
그분들의 위로의 말처럼 긴 고통의 터널도 함께 지나주셨고 말없이 같이 계셔주셨던 것은 그때는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런 상태가 한 열흘 계속되었는데 갑자기 어느 순간엔가 본당신부님이 보고싶어졌고 성가가 듣고 싶어졌다. 이유도 계기도 없이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갈수록 간절해졌다. 그때부터 신부님을 기다렸다. 차마 와주십사고 청하기엔 너무 주제넘은 것 같아 언젠가 오시겠지 생각하며 당연히 오시리라는 기다리는 마음이 되었다.
며칠이 흐른 어느날 오후 신부님이 병실에 들르셨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신부님 손을 잡고『신부님 성가 좀 불러 주셔요』하고 졸랐다. 신부님께서는 웃으시면서 한 30여분 여러 성가를 불러주고 가셨다. 성가만 부르시고 가신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가슴속이 깨끗해지는 것 같았고 알 수 없는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그날 밤 나는 수술 후 처음으로 깊이 잠을 잘 수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새로운 세상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 아침 일찍 들어온 간호사가『정재숙씨 오늘은 딴사람 같네요. 무슨 일이 있어요? 아주 좋아 보이네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 후로 다시 수술전과 같이 평온한 심리상태가 되었고, 잘 견디며 의료진을 신뢰하고 그분들을 통해 주님의 치유의 손길이 내게 오심을 믿게 되었다. 다른 분들의 문안과 기도가 진심으로 감사하게 느껴졌고 고맙고 은혜로웠다. 석달을 입원해 있는 동안 수많은 분들이 찾아와 기도해 주셨고 위로해 주셨으니 나는 정녕 믿는 분들의 기도와 위로의 덕분으로 다시 일어나 이렇게 오늘을 은총으로 살고 있는 셈이다.
배에 꽂아 놓았던 세개의 호스 중 마지막 남은 한 개의 호스를 빼고 석달만인 5월 8일 퇴원을 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잘 참고 견디어준 남편과 아이들, 시부모님이 고맙고 감사했다. 그때 순간의 마음같아선 다시는 미워할 일도 싸울 일도 원망할 일도 없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고맙고 감사하고 기쁠 뿐이었다.
더욱이 남편은 환자로서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을 텐데도 무사히 견디어 주었다. 내가 입원하여 수술받기 바로 전에 남편은 심한 부정맥증세로 입원해 있던 환자였다. 세브란스병원 심장내과에 남편을 입원시킨 뒤부터 심한 통증으로 앓았으나 보호자가 없어서는 안 될 상황이었기에 아픔을 참고 임시방편으로 약국에서 약을 사다먹으며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나 무서운 병소가 자라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남편의 병구환과 과로에 지쳐 생긴 위장병쯤 되려니 하고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타는것 같이 살아온 7여년의 세월! 남편은 81년도에 죽음직전의 심근경색증을 앓았고 가망이 없다던 상황에서 기적처럼 소생하였다. 남편의 침대 옆에 밤낮없이 지켜앉아 고비를 넘기던 그때 나는 주님을 부르짖었고 남편의 소생으로 그분의 응답을 받은 우리는 온가족이 영세입교하였다. 신앙 안에 다시 태어난 우리는 ME주말강습으로 새로운 부부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고 곧 견진까지 받게 되었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온 우리의 삶에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고 주어진 여건과 모든 것을 수긍하게끔 변모되어 갔다.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갈등과 원망으로만 살아오던 상대방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끼게 되었으니 주님은 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당신께 이끄셨다고 할까.
영세입교 후 남편은 심장조영(바이패스수술)을 하게 되었고 세브란스병원 심장내과의 정기치료 환자가 되었지만 정상적으로 근무도 하고 신앙생활도 열심이었다. 복사도 서고 독서도 하고 기도도 하고 미사해설도 하는 남편을 지켜볼 때마다 나는 감사로움에 눈물을 흘렸다.그러나 또 한번의 고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85년 겨울 남편은 뇌경색으로 쓰러져 반쪽의 몸이 감각도 없어지고 말을 듣지 않는 환자가 되어버렸다. 남들이 쉽게 말하는 반신불수가 된 것이다. 끔찍하였다. 그러나 석달여의 입원과 투병 끝에 남편은 거의 정상으로 회복되었고 다시 직장에 나갈 수도 있게 되었다. 전과 같지 않게 사고력이 좀 떨어지고 왼쪽의 감각이 완전하지 못한 것 외에는 거의 회복이 되었다.
그러나 심장에 부정맥증세는 가끔씩 나타나곤 해서 불안하기도 했는데 87년 1월 다소 심해져서 다시 입원을 했던 것이다. 그랬던 남편이 갑자기 충격적인 일을 당했으니 쇼크나 받으면 어떻게 할까 둘 다 쓰러지는게 아닌가 하고 모두들 애간장을 태웠던 것이다. 병상에 누워서도 남편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쓰러져선 안되는데. 둘 다 쓰러지게 하지는 않으시겠지. 그러나 만약에…생각만해도 끔찍하고 아슬아슬했다. 아직 어린 아이들 셋을 생각하니 더욱 기가 막혔다. 그러나 남편은 아무 이상없이 잘 견디어 주었고 아이들도 충격은 많이 받았지만 용케 견디고 있었다.
퇴원을 하고 한달후부터 항암치료를 받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새로운 고통의 상황과 부딪친 것이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절망과 좌절이 다시 엄습했고 헤어나기 힘든 피나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제부터 병과의 처절한 사투가 시작된 셈이었다. 왜 암환자들이 중도에 절망하고 포기하게 되는지 알 수있었다. 수술은 거기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하였다. 수술후의 긴 치료과정이 환자를 지치게 만들고 포기하게도 만든다.
피를 뽑아 수시로 검사하여 백혈구 수치를 점검하여 적절히 항암제를 투여하는데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오심과 구토 온몸을 흠씬 두들겨 맞은 것 같이 불쾌하고 아픈증세, 급격한 기력쇄진으로 죽어갈 수도 있는 후유증, 급격히 떨어져 내리는 백혈구수치, 무방비상태의 저항력으로 오는 온갖 감염증세, 시커멓게 떨어져 내리는 머리카락들을 보며 눈앞에 죽음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낀다.
그렇게 네번의 항암제를 투여받은 11월경. 내 몸과 마음은 심각해져 있었다. 백혈구 수치는 2천대를 오르내렸고 감염이 된 발가락에서는 고름이 흘러 내렸다. 수혈을 하려고 했으나 피를 구하지 못해 할수 없었다. 정상적인 백혈구수치인 8천~9천보다 턱없이 떨어져 내린 수치로는 항암제도 투여받을 수 없다고 했다.
거기다가 퇴원 후의 방심과 섭생에 태만해진 가족들 특히 시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미움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대로 해주지 않고 지겨워하고 힘겨워하고 무성의하게 내버려 두는데 대해 심한 분노마저 느끼게 되었다.
한없이 들어가는 치료비 등으로 남편과는 섭섭한 마음을 품는 언행에 토라져 버렸고 가사를 힘겹게 수행해나가야 하는데 오는 고부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여든이 다 된 시모의 수발을 고맙고 감사하게 여기기보다 항상 거북해하면서 맘에 안들어하고 못마땅해 했으니 마음의 병이 깊을대로 깊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상태를 이겨내려고 무진애를 썼다. 고백성사를 자주 보았으며 치유의 안수기도를 청해 받기도 했다.
용서의 기도를 매일 바쳤으며 내 자신을 불들어 주십사는 간절한 눈물의 기도도 올렸다. 본당차원에서 열리는 MBW교육에도 참가했고 성령기도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머리와 가슴까지는 사랑한다고 용서한다고 생각하며 노력하고 있었으나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지는 못했다.
그렇게 껍질이 두껍고 완고한 자신을 어쩌지 못하고 괴로움으로 사는게 즐겁지가 못했다. 사랑하며 살아라고 새로 주신 나날을 온통 미움과 갈등과 원망으로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부끄러웠다. 암담했다. 하루를 거의 눈물로 보냈다. 왜 나는 이런 인간밖에 되지 못하는가하고 자신을 한없이 질책해 보았지만 막상 맞닥뜨리면 온갖 후회와 반성과 결심은 간곳 없어지고 미움만이 들끓곤했다.
차라리 그때 가장 깨끗한 마음이었을 때 죽었더라면 이런 지옥같은 마음은 갖지 않아도 되었을 걸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마음이 지옥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사이 한발한발 죽음의 그림자가 나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으니 정말 나는 한치 앞을 내다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다시 그해 12월 성탄절을 얼마 앞두지 않고 재차 긴 입원생활에 들어갔다. 황달증세가 나타났고 피부에 가려움증이 생겼다. 백혈구 감소증이 심해서 면회마저 제한할 정도였다. 골수에 전이되었는가싶어 온갖 검사를 다시 시도했으나 다행히 전이된 상태는 아니라고 했다. 간기능도 매우 저하되어 있었고 당뇨가 4백~6백이나 나와서 이 인슐린 주사들 맞고 쇼크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수술했을 때의 상태보다 더 심각한 상태인 것을 그때야 알았다.
1월 날씨도 매서운 때 남편에게 묘자리를 사놓으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더 이상의 형벌이 이보다 어디 있을까 싶었다.「죽으면 그만이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 상태를 알아챈 주위의 가까운 분들이 내 마음을 돌이키고자 온갖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주위에서 죽어가면서 모든 것 용서해라고 하면『용서할 수 없어요. 나혼자 죽어가는데 용서가 어디있어요. 죄 안지은 당신네는 살고 죄 지은 나는 죄의 댓가로 죽으면 그만이잖아요. 너들은 나죽어도 아무 상관없이 잘 살아갈 것이고 죽음은 자기들과는 상관없는 먼 남의 것으로만 여길 것이고 죄지은 자는 죽어가고 죄없는 자는 살아있는 은총을 입는다고 여기며 살고 있을것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이런 나의 마음을 읽은 내 대모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면서『아이구 소피아 큰일났다. 이걸 어쩌노. 그런 상태로 어떻게 주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노』하면서 계속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내 귀엔 그 말이 달갑잖게 들리기만 했다.『왜 내가 죽어, 나는 안죽어』내 손을 잡고 울던 대모는 힘없이 돌아갔다. 다음날 이인복(마리아)님의「완덕에로 나가는 길」이라는 카셀 테잎을 가지고 왔다.
『소피아 이것 꼭 들어라. 소피아 왜 그리 못땠노. 안된다 소피아 이거 다 듣고 이야기하자』하며 무섭게 질책을 하고 갔다. 반발심이 생겨 머리맡에 챙겨만 놓았던 테잎을 그 이튿날 밤부터 듣기 시작했다. 남편이 라디오를 일부러 가져다주며 들으라고 채근까지 해주는 바람에 시작했다. 사흘을 계속해서 들었다. 눈물이 얼마나 흐르는지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더이상의 고통이 없다고 생각하며 교만을 떨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회개의 눈물, 어리석음에서 눈뜬 자책의 눈물통회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
나도 모를 일이었다. 새로운 희열을 느꼈고 다시금 감사로움과 평화를 맛 볼 수 있었으니 정말 주님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나를 찾아 주시고 붙들어 주시고 계셨다. 주님은 우리 누구나 당신 도구로 쓰신다는 것도 느끼게 되었다.
우리가 하는 작은 위로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알게모르게 주님은 함께 하셔서 당신을 느끼고 체험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우리는 즐거이 주님도구가 되어야 한다. 내 힘과 시간이 닿는데까지 작은 활동이나마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고 고통받는 이를 위로하고 기도해 주어야 하겠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고 검사를 끝낸 다음날 아침 늘 심각하던 (아니 어쩌면 일부러 무표정해 보이던) 주치의 선생님이 웃는 얼굴로 회진을 오셨다.『정재숙씨 검사가 잘못 되었는 것 같을 정도로 갑자기 몰라보게 결과가 좋아졌어요. 오늘 다시 한번 새로 해 보아야겠어요』그러나 그 결과는 잘못 된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그 후 점차 회복이 되어 2월에 퇴원을 하였다. 항암제 투여는 두번이나 예정이 남았지만 하지않고 있다. 당뇨도 이젠 정상이고 백혈구도 4천~5천을 오르내리고 있어. 무리하지만 않으면 별 지장이 없는 생활을 할 수 있다.
2주일에 한번씩 병원에 다니며 피검사하고 투약받아 오고 하는 게 가장 큰 일의 하나가 되었지만 지겹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물론 회복기에서 인간이기에 느껴야하고 겪어야하고 치루어내야 하는 온갖 잡다한 고뇌와 갈등과 숱한 감정의 소용돌이야 어찌 말로 다 나타낼 수 있으며 글로 다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그저 아무도 몰라주어도 주님만은 알아주시리라 굳게 믿으며 한발 한발 당신께로 가까이 가고 있을 뿐이다.
퇴원을 하고 남편과 성령기도회에 주일마다 참석을 하였다. 노래부르고 작은 율동을 하며 진심으로 기도드리는 순간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89년 1월에는 남편과 함께 2박3일의 성령세미나 피정을 다녀왔다.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받고 돌아왔다. 지금까지 기쁘게 순응하며 살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임을 굳게 믿고 있다. 또한 본당에서 하고있는 성경공부에 참가하여 하느님의 말씀과 묵상에 귀 기울이고 자신을 침잠시키는 은총과 축복의 시간을 얻게 되었다. 지난 1월부터는 아직 별다른 활동은 할 수 없지만 전에 들어있던 레지오활동에도 다시 참여하게 되었다.
칡꽃이 보랏빛으로 온 산천을 뒤덮던 지난해 8월 남편과 나는 군위 가톨릭묘원에다 영원한 유택도 마련해 놓았다. 멀리 산줄기가 젖먹이처럼 어깨 밑으로와 안기는 높다란 중턱에 영원의 집을 터잡아 놓고나니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온 산천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들꽃의 향기가 천국의 그것처럼 느껴졌다. 실로 그분의 안배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차근차근히 죽음을 준비하게 해주신 일!
누구에게나 죽음은 약속된 일인데도 모두들 자기에게만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여기며 살고들 있지 않은가. 무엇이 우리를 미련스럽게 만드는가. 무엇이 우리를 집착으로 이끄는가. 그 분이 주셨다가 거두어 가시면 그뿐. 주시는대로 받아 순응하며 살아야 하듯 또한 거두어 가시는대로 돌려드려야 하는 게 우리 삶이 아닐까.
나는 정말 기막히게 내게 주신 모든 것에 순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내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되고 준비하게 해주신데 대해서 깜짝깜짝 놀랄만치 은혜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내가 암환자인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초월의지는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보잘것 없고 나약하고 쉽게 포기하고 절망해버리던 나, 스스로에게서 저절로 생긴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지않는 나, 그것은 선물이다.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 고통을 통해 당신을 확고히 체험하게 하시고 삶을 더 뜨겁게 받아 안으라고 주신 그분의 선물임을 굳게 믿는다.
나는 삶은 옥수수를 좋아한다. 어쩌다 아이들과 삶은 옥수수를 먹을 때 나는 농담(사실은 진담이지만)을 한다.
『애들아 엄마 제사에는 꼭 옥수수 삶아 놓아야 한다』
『예. 알았어요. 그렇지만 오래 안사시면 안 놓아 드려요』
『잡채도 놓고 오징어도 놓고…』
『엄마 술은 뭘로 할까요?』
『칵테일 좋지. 좋아. 그걸로 정했다』
『하하하호호호…』
겪어 보지 않은 이들은 사위스럽다고 할 짓거리이지만 나는 딸들과 이런 대화를 의도적으로 자주 나눈다. 남편은 굳이 듣기 싫어 피하는 눈치이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처음엔 듣기 싫어하던 딸애들도 이제는 한술 더 떠놓고 깔깔 웃기까지 한다.
난 그 모습을 보면서 느긋한 마음이 되곤 한다.『어젠가가 될지 모르지만 이 장면도 분명 하나의 즐거운 추억의 장면이 될테지. 살아 있는 동안 좋은 추억의 장면을 많이 만들어 주자. 정말 내가 죽고난 후에 저 아이들은 엄마를 위해 그런 일들을 즐겨 할테고 그러면 나는 저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것이 되고 같이 있는게 될 것이다.
또 정작 엄마의 죽음 앞에 섰을 때 가슴아픈 별리로만 여기지 않고 당연한 순리로 받아들이고 먼 나들이라도 떠나는 것같이 엄마를 보낼 수 있을테지. 감사로움이여. 이런 시간 주신 당신은 너무도 감사로운 분입니다』라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눈물이 난다.
정말 산다는 건 무엇이고 죽는다는 건 무엇일까.
오늘은 순간이고 죽음은 영원한 것이지 않는가. 영원을 향해 가슴을 열고 주어진 순간순간을 소중히 받아 뜨겁게 사는 것.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닐까 그런 마음으로 당신께 바치는 노래 한구절을 지어 보았다.
<오늘>
오늘도/눈 뜨니/내가 있었다/사랑하는 것 다/그대로/있었다/어제 있던 모든 것/모두 새롭게 있었다/내일도/눈 뜨면/오늘이 될 것을/참으로/주시는 날/이상키도 하다.
■ 당선소감
“날 위해 기도해 준 모두에게 이 기쁨, 기도처럼 드립니다”
고통도 은혜롭게 느껴질 때, 사는 것이 축복인 것을, 당신은 선물로 주셨다.
어떻게 내가? 아무것도 아닌 내가, 주신대로 받아 안으며 느껴워 할 수가 있게 되었는지 나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감사롭다.
기쁜 것을 기뻐하고 아픈 것을 아파하는 마음, 있는 그래도의 마음으로 살게 해주시리라 믿는다.
나보다 더 좋아하는 세 딸과 남편을 보며 그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신 분께 찬미와 감사를 바친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도 이런 작은 기쁨들을 이도처럼 드리고 싶다.
내 이야기가 고통받는 이들에게 작은 위로의 도구라도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런 뜻으로 이 행사를 마련한 가톨릭신문사와 뽑아주신 분들께 고마움을 함께 드린다. <대구직할시 수성구 만촌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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