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동안 이웃하며 가깝게 지내던 지혜네가 갑자기 육지로 발령이 났다고 저녁 늦게 찾아와서 이야기 한다. 그래도 얼마동안은 더 있겠거니 하고 언제가냐고 했더니 내일이라고 한다. 그제서야 와락 섭섬한 마음이 앞선다. 낯선 제주에서 그래도 유일하게 유난스레 예뻐해 줬는데.
짐은 중요한 것만 챙기고 웬만한것은 두고 갈테니 떠난 다음에 쓸것있으면 가져 가라고 한다. 지혜네 가족들이 황황히 떠나고 심난스레 어지러진 그 방을 보니 먹다남은 쌀이며, 부식, 양념들이며, 소모품들이 꽤 쓸만하게 남아있었다. 평소에 쌀값 몇백원이 더 싸다고 한참 걸어야 하는 농협 구판장에서 20킬로 짜리 쌀을 사서 머리에 이고 아이 손을 잡고 오던 알뜰함이 눈물 겹던 지혜 엄마였다.
벽에 걸린채 그대로 남아 있는 두루마리 휴지를 보고 아직도 화장실에서는 신문이나 못쓰는 종이를 쓴다는 얘기도 생각났다. 나는 주섬 주섬 남은 것들을 챙기며 문득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할때가 생각났다.
아무리 열심히 알뜰하게 악착같이 살다가도 어느날 갑자기 주님이 부르시면 모든것은 그대로 남겨 둔채 빈손으로 떠나야 함이 그토록 알뜰하게 살림하다가도 중요한것 몇가지만 챙겨 떠나야 하는 지혜네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우리에게 버려도 좋은 것과 정말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니 우선 나에게서 버려야 할것들이 생각났다. 모든것을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시작되는 사소한 다툼으로 많은 사람들과 주름진 관계를 갖기도 했었고, 남의 성공과 뛰어남에 대하여 늘 질투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었다. 때로 단순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만으로 마음이 꽉차 있어 차마 주님께서 내 마음자리로 들어오실 곳을 마련하지도 못했었다.
조금 안다는 지식으로 남을 업신 여기기를 또 얼마나 자주 했으며, 이 작은 혓바닥으로 말의 비수를 꽂아 상대를 난도질하기를 얼마나 자주 했던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정말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것은 이웃의 어려움을 내일처럼 생각하는 마음, 내게 있는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어 텅비어 있는 마음 안으로 주님께서 언제라도 찾아드시어 우리를 위로해 줄수 있는 참된 가난을 즐길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찬바람이 스산한 계절이다. 육신에서 분리된 어느 영혼이 저 스산한 바람을 타고 하늘을 오르는듯한 느낌으로 가슴이 서늘하다. 이 세상 떠날때 하망함없이 어찌 떠날수야 있으랴. 그러나 언제라도 주님께서 부르시면 떠나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수 있다면 마음안에 가득한 음산한 욕심들쯤 훌훌 내 던지고 살아갈수 있지 않을까. 주님안에서 주님을 통해서만 그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오늘 지혜네가 남기고간 부식들과 쌀을 가지고 음식을 만들어 이웃들을 불러 가난한 잔치나 벌려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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