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복의 열기가 아스팔트까지 녹이려 들던 정오, 전화벨이 요란히 울렸다.
『여기 메리놀 기획실인데요. 김문희씨 보호자 계십니까?』
『네, 전데요』
『잠시 만나뵙고 전해드릴 게 있어서요』
『뭔데요. 조금 바빠서요 뒤로 미루면 안될까요?』
『바쁘시더라도 꼭 오셔야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난 헐레벌떡 메리놀 언덕길을 오르면서 내가 정열을 쏟으며 근무했던 메리놀약국 조제실하며 50대가 넘도록 인연이 닿는 정다운 그 길을 숨가쁘게 오르고 있었다.
『여기 40만원 김문희씨 보호자께 드립니다』
『아니 이게 무슨 돈이죠?』
『네, 안구 기증 받은 두 분께서 광명의 댓가로는 너무 적지만 그래도 성의로 꼭 전해드리라고 20만원씩 낸 모양이니 받아가십시오』
『아니예요. 그건 언니 뜻이 아니예요. 언닌 그 두 분의 눈을 뜨게 한 것만으로도 기뻐하시고 게실겁니다』
『자, 부인 그래도 그렇지 않아요』
난 할 수 없이 40만원을 든 채 높은 언덕길을 비틀대며, 허위적대는 다리의 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벨라뎃다 언니의 임종, 1989년 7월 17일.
큰 딸아이 지숙이의 울부짖음이 귓가로 다가왔다.
큰 딸아이 지숙의 울부짖음이…….
『눈도 없이 어찌 이모가 천국에 갈 수 있어요. 안돼요 이모의 눈만은……』
임종 후 두 눈을 안구은행에 기증하고 흰 가제로 가려진 언니모습에 애통해 하던 지숙의 흐느낌이 날 짓눌러왔다.
59세까지 동정녀였던 언니! 언니의 두 눈은 김해에서 인쇄업을 하시다 15년전 실명한 안필영씨와 영천의 청년 안병갑씨에게 주어져서 그들이 앞을 보게 됐다. 환희의 모습으로 내손을 부여잡던 며칠 전 병실 모습이 떠올랐다. 53세의 장년과 26세의 앞날이 청청한 청년이었다. 더구나 안병갑씨는 생일날 눈앞을 보게 된 기쁨을 눈물로써 감사하지 않았던가!
난 비틀거리는 나 자신을 진정코자 애쓰며, 7월에 사도예절을 거행했던 중앙성당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신부님, 빈첸시오회에 50만원을 기증해 주세요』
『어찌된 거예요? 마리아 데레사씨…』
신부님도 말씀을 잊지 못하셨다. 나머지 20만원은 프란치스코 3회 아순따 자매에게 드렸다. 항시 산청 음성 나환자촌을 위해 혼신을 바치시는 분이다. 그곳에 전달해 주시라고 부탁하였다. 난 그제서야 천상에 계신 언니의 심부름올 무사히 마친 가벼운 마음으로 비틀거리던 자신을 가까스로 세우고 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엄마 눈도 없이 가요? 안돼요!』『이모는 천당에 가셨으니 울면 안된다』『얘야! 안구은행에 연락을 빨리 해라. 늦으면 안된다』
『난 천국에 가니 절대 울지 말아라 마리아 데레사야』
온통 귓전을 때리고 있는 며칠 전 7월 17일 그 날이 생생히 눈앞에 떠올라와 눈시울을 붉히며 약국을 들어섰다.
세계 2차대전 말기, 내가 9살 때였을 때 우리 가족은 잠시동안 경기도 김포에 피난을 갔었다. 난 그곳에서 국민학교에 첫 입학을 하였는데 교실 4개의 산언덕에 위치한 미니학교였다.
난 1학년, 언니는 4학년이었다. 언니는 한쪽 다리를 7살때부터 계속 앓았는데 그 무렵엔 거의 쓸 수 없을 정도로 발육도 안되고 힘도 없었다. 짚고 서야 걸음을 겨우 뗄 수 있었다. 우리 둘은 바늘과 실처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등하교 길이었다.
언니는 아이들의 좋은 놀림감이 되기도 해서 어렸지만 자존심이 상해 울기도 많이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때는 보리 이삭이 바로 피기 직전이었다. 푸른 파도처럼 풋보리가 초록물결을 이루며 그 너른 김포평야를 뒤덮고 있었다. 친구는 자기 집에 놀러가자고 했다. 나는 시골의 모든 자연이 신기하고 놀라워 넋을 빼앗기고 있던 찰라 언니가 기다린다는 건 깜빡 잊고 친굴 따라 나섰다.
녹색물결의 보리밭 이랑을 한없이 걸어서 친구집에 가서 놀다 노을이 질 무렵 놀아서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학교 근처 논둑길을 지나 왔으나 날이 어느새 어두웠고, 누군가 어딜 데려다 줬겠지 하는 요행을 바라며 집으로 들어섰다.
『언니는?』
『안 왔어요? 난 친구집에서 놀다오는 길인데요』
어머니는 학교쪽으로 마구 달려가고 계셨다. 난 어린 나이였으나 낭패감으로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하늘엔 조각달이 걸려 있었다. 얼마 후 언니는 울어서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엄마 등에 업혀서 집에 도착하였다. 언니는 방과후 날 찾았으나 학교에는 없었고, 하마나 오려나 기다리며 교문 앞 소나무 밑에 여지껏 서 있었단다. 날은 접점 어두워지고, 학교는 아무도 없이 텅텅 비었고, 깜깜한 뒷산에서 여우 우는 소리가 들려 무서웠단다. 걸을 수 없었기에 소나무를 잡고 울다울다 지쳐서 목도 쉬고 두 눈이 퉁퉁 부어서 언니같이 보이지 않았다. 난 엄마의 꾸중이 두려웠으나 그날은 아무 말씀 없이 언니를 씻기시며 울고만 계셨다.
그 다음 다음날 한낮이었다. 집엔 아무도 없었다. 뒷뜰 장독대 옆 조용한 곳으로 엄마가 날 부르셨다. 그 때는 엄마의 꾸중이 두려웠을 뿐이었다. 그런데 엄마는 꾸중 하지 않고, 조용히 내게 다가오며 말씀하셨다. 『옥희야! 언니는 네가 맡아야 한다. 여자형제는 둘뿐 아니냐. 남자형제는 서로 마음을 모른단다. 그러고 부모는 나이가 들면 죽는단다. 언니 혼자 남으면 어떻게 사나? 제 헝제간이 버리면 남도 버린단다. 언니 보고「절뚝바리」라고 놀리면 네가 말리고, 걷지 못하면 잡아주어야 한다. 불쌍한 언니다. 너희들은 다 몸이 성하지 않니?
그저께 너도 알았겠지만 네가 언닐 기다려 주지 않아서 달이 뜰 때 까지 그 무서운 산속에서 걷지도 못하고 울고 있었지-. 옥희야! 부탁한다. 알아듣겠니?』하고 타이르셨다.
나는 그때 비로소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엉엉 울었다. 엄마도 함께 우셨다. 눈물을 닦으며 엄마에게 약속드렸다.
『죽을 때까지 언닐 지킬께요』고개를 돌려보니 장독대 옆에 곱게 핀 백일홍이 무리지어 서있었다.
언니 가실 때까지 나는 일생동안 엄마에게 드린 약속을 잘 지키려고 했었다. 무심하게 잊고 생활하다가도 문득 9살 때 녹색물결의 보리밭, 조각달, 백일홍이 핀 장독대 옆의 엄마 모습, 두눈이 퉁퉁 부었던 언니 모습이 떠오르면 깜짝 놀라곤 했다.
어릴 때 언니를 버리고 놀러 갔던 기억은 나를 슬프게 하고, 가슴 아프게 해서 종종 눈물 짓게 했다.
『옥희야!』
『응』
『난 어제 밤에 꿈을 꿨는데, 저기 보이는 성당 십자가 있지? 그 위로 선녀가 나타나서 올라가더라』
『뭐라고! 선녀가 어떻게 생겼는데 응?』
『응, 나비 같은 날개를 달고 말히지. 정말 이쁜 분이셨어』
어릴 때 들은 언니의 이 꿈 얘기는 잊혀지지 않는다.
해방되던 해 살던 인천집은 숲이 있는 언덕에 자리 잡았었는데 언니는 관절염이 된 다리를 이끌고 창문 곁에 앉아 밖을 내다보는 시간이 자연 길어졌고, 가까이 내려다보이는 박문여고와 성당의 뾰죽한 십자가를 쳐다보길 좋아했고 새벽 종소릴 은근히 기다리는 유년시절이었다.
우리 가족은 너무나 안전하고 무사하게 6ㆍ25발발 1년 전에 아빠의 직장을 따라 정든 이천을 떠나 진해에 와 있었다.
앉은뱅이가 되다싶이한 언니가 피난민들 중에 끼어서 함께 고생을 했다면 어찌 됐을까? 생각만 해도 암담하다.
언니는 엄마 등에 업혀서 진해에 옮겨져 뜰이 넓은 집에서 살게 되었다. 진해란 곳은 6ㆍ25전에는 군인가족이 주로 살았고, 너무나 조용하고, 온 시내 사정이 이웃처럼 서로 알려지고, 서로 돕던 시골같은 곳이었다.
이 무렵 하느님은 언니에게 첫번째 은인 한 분을 보내 주셨다.
『듣자하니 이 집에 예쁜 처녀가 못 걷는다는 소릴 들었어요. 하느님 뜻이면 걷습니다. 나는 한의사인데 침을 맞아 봅시다. 치료비는 필요없어요. 침놓는 데 돈이 들지 않으니까요』
느닷없이 방문해 오신 분은 진해성당 전교 회장님이셨던 진말징씨였다. 오랜 병고로 고립되어 극도로 배타적이 되어 있던 언니를 찾아온 것은 기적적인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진해에는 지금의 중앙성당 하나밖엔 없었다. 그 성당은 일본인이 지어놓은 사찰을 인수한 것으로 오늘날 새로 지은 성전과는 달랐다. 신자수도 얼마 없었고, 앞에 제대를 차려놓고 미사를 드렸다. 진말징 회장님은 요즘의 본당 평협회장인데 1인10역 이상을 하셨다. 전교활동, 병자방문, 상가방문, 전례지도, 교리공부, 성당환경정리 등 모든 것에 관계 하셨다. 진 회장님은 거제도가 고향이고, 진해에서 한의원을 경영하셨다.
일주일에 몇번인가 침통을 들고, 무료치료를 다니시고, 전교하시곤 했다. 이 분의 자제이신 진팽씨는 지금 부산 수산대학 해앙식물학 교수로 계신다.
전교 회장님의 방문을 받고 과학을 전공하시고, 교수였던 아버지께서는 한의학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으나, 앉은뱅이 된 딸에게 무슨 짓인들 사양하랴! 특히 어머니는 기쁘게 환영하셨다.
치료를 시작한 후 서서히 치유되기 시작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오랜 상처로 유착되어 오그라진 다리 한 쪽이 펴지기 시작했다. 발육도 안되고, 짧은 다리였으나, 설 수 있게 되었다. 1년 넘게 치료한 후 그때서야 진 회장님께선『너 성당 한번 다녀볼래?』하고 언니에게 말씀하셨다. 건강도 좋아지고, 사랑의 치료가 마음의 문도 열게되어 회장님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두 다리로 걷을 수 없으므로 앙쪽 지팡이를 겨드랑이에 끼고 성당에 나갔다. 그날이 바로 부활절이었다. 촛불도 많고, 꽃도 많고, 사람들도 많았다. 그 후 언니는「벨라뎃다」막내 동생은「니고나오」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게되었다. 그때부터 항상 화만 내고, 우울하기만 했던 언니 얼굴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주님과 함께 한 언니의 삶이 이때부터 두드러지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앙쪽 겨드랑이에 지팡이를 짚고 성당에 다녔는데 본당 신부님이 늘 가엽게 여기셨다. 그때 본당신부님은 지금은 유명을 달리하신 대구교구의 신상조 신부님으로 언니의 2번째 은인이시다. 6ㆍ25 전쟁터에서 불구가 된 많은 상이군인들을 도우려고, 세계 각국에서 의료진이 우리나라에 왔었다. 서독에서 온 외과팀이 옛날 부산여고 자리에 서독병원으로 통하는 야전병원을 개설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신 신부님께서 주선해 주셔서, 우리가족은 큰 희망을 가졌다. 수술하면 어쩌면 걸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다행히 수술하였는데 그 당시 새로운 기술인 백금선으로 관절을 이었다고 들었다. 못쓰게 된 관절을 잘라내고 수술하니, 힘이 약이고 짧은 한쪽 다리의 불편은 있었으나, 염증도 통증도 멎게 되었다. 우리 가족과 언니는 기뻐하고, 감사하였다. 언니는 교리문답 때 배운 지식으로 곧잘 농담하였다. 천주 성삼은 위격은 다르나 하나이시듯 내 한 쪽 다리는 3세트로 한 다리면서 3개가 다르다. 지팡이 한개, 짧은 다리 한개, 그 다리에 신는 보조기 한 개. 그러면서 마음의 여유도 갖기 시작하였다. 우리가족은 그때부터 밝은 빛이 비춰져서 차례차례 영세 입교하였다.
민족적 비극인 6ㆍ25로 많은 사람이 죽고, 불행해졌으나, 자비롭고 사랑이 많으신 주님은 언니에게 특별한 은총으로 걷게 하시는 은혜를 주셨다. 6ㆍ25가 아니면 그 당시 어찌 첨단적인 의료혜택을 입을 수 있었으랴!
주님의 섭리는 넘치도록 더 주셨다.
6ㆍ25로 많은 지식인들이 피난와 있었는데 아동문학가인 남편과 함께 김미사 선생님도 와 계셨다. 지금 성심여대에 계신다고 들었다. 이 분은 전쟁으로 모두 물자가 귀한 때라 그곳 주부들이 가족의 옷을 지어 입도록 잠깐동안 양재를 가르치셨다. 그때 언니는 이분을 만나 양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언니의 3번째 은인을 만난 것이다. 신앙도, 건강도 갖게 되었고,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집에서는 가정통신으로 중ㆍ고등학교 교육과정을 큰오빠에게서 배우고, 앙재를 배우며, 스스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서울 뉴스타일 앙재학원을 졸업하고 진해에서「해성야재학원」을 섭립하여 원장이 되었다. 손재주와 머리가 뛰어난 언니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으나 확실히 하느님은 언니편이셨다.
내가 약대를 졸업한 1959년도에 언니는 진해에서 많은 학생들을 배출한 앙재 선생님으로 불리게 되었다. 나도 언니 학원 본과 졸업을 하였는데 교수법이 얼마나 뛰어나던지 내가 알고 있던 16년간의 어느 선생님보다 훌륭하였다. 복잡한 재단법을 아주 쉽게 설명하고 익혀주었다. 그 무렵 진해에 거주 했던 장교부인들도 많이 언니의 제자가 되었다.
다시 언니가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은 내가 결혼한 1963년 후부터였다. 부산에 지금의 한독여자실업학교가 처음 개교하여 막 자리를 잡게 될 무렵부터이다. 언니는 그곳 수공선생님으로 일하게 되었다. 설립자인 독일인「칼로 슈밑케」씨는 학벌 등에 구애됨이 없이 언니의 수공예품 몇 점을 보고는 실력을 인정하고 받아주셨다.
그분이 언니의 4번째 은인이된다. 몇 년동안 은혜롭게 잘 있었다. 그러나 학교가 제 자리를 잡게 되고 문교부 학력 인정학교로 되어가면서 교사 자격증이 필요하게 되어 그곳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기술교사로서 정년까지 함께 일하자고 했지만 그분에게 누가 될까봐 끝내 사양했던 것이다.
언니는 학교를 그만두고 나니, 수입도 없어지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다. 이때부터 언니가 당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수입도 없고, 어머니도 계시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았으며, 동생들은 다 결혼하여 정말 혼자 외롭게 남겨졌다. 몸도 장애자이므로 형제들에게 짐이 될까봐 영원히 모르는 곳으로 숨을까 생각하고 몇번이나 결심했었단다. 어머니 가신 후부터 살과 뼈를 깎는 마음 고통을 당하며 이때부터 언니는 자기를 깎아 버리고 나누는 삶, 고통의 삶 그러나 거룩한 성체적 삶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 시작한 것이다. 몸 성한 우리 남은 5남매, 그 누구도 언니의 희생적 사랑과 봉사를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특별히 나는 언니의 사랑과 희생과 봉사를 제일 많이 받았다.
결혼 후 5년동안 산후에 결핵에 걸려 움직일 수 없을 때 그리고 그 후에 그 어려운 시기에 언니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떻게 내가 오늘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을까! 성한 우리 친정 5남매, 그 누구의 집도 임종 때까지 언니의 사랑에 찬 기도를 받지 않은 집이 없었으며, 언니의 희생과 봉사를 받지 않은 집도 없다.
언니의 봉사와 은혜 중 잊지 못할 사건이 있다. 어렸을 때 나는 언니보고『내가 딸 둘 낳아서 언니 하나 줄께』그랬단다. 결혼한 후 딸들을 낳았을때 나는 언니에게 그런 약속을 했는지 까맣게 잊었었다. 그런데 나는 둘째 아이를 낳고 병을 얻어서 부득이 언니가 둘째 딸을 키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언니가 아이 키우는 고통은 받았으나 그「가짜딸」을 참으로 사랑하게 되었고, 이모를 친엄마 이상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언니에게 딸 하나를 주겠다고 한 약속을 잊었으나 하느님께서는 지키게 하셨다.
언니는 장애자였으나 도움받는 사람이 아니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다. 언니는 참으로 성모님을 사랑하셨다. 그 삶도 성모님처럼 고통과 가난과 봉사와 사랑을 실천하며 살다간 분이다. 평소에「네 머리를 꾸미오리」란 성모님 노래를 즐겨 불렀는데 그 행동도 선행과 덕행으로 실제로 성모님께 꽃다발을 올리는 삶, 오로지 그 한길 뿐이었다. 당신 말처럼 3세트로 산언덕 위에 있는 청소부집에 전신마비로 누워있는 처녀를 1년 넘게 쑥뜸치료와 전교를 하러다녔다. 지팡이 짚고, 언덕에 오르내리는 것이 참으로 딱했다.
하루는 나에게『오늘 참 이상한 일이 있었단다. 그 방에 가니 여지껏 맡아보지 못한 좋은 꽃향기가 났어. 그래 처녀에계「향수를 뿌렸니?」하고 물으니「아니오」하더니 얼굴을 붉히면서「똥 쌌어요」그러지 않아?』 이것이 무슨 일이까『어떤 향내더나』고 물으니『백합향인지 새벽 산속에서 나는 냄새같이 신선이고 깨끗한 냄새』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니 언니의 사랑에 친 행동이 성모님께 드린 천상향기가 되돌려 풍겨진 것 아닌가 짐작될 뿐이다. 언니 아랫방에 전신마비로 누워있는 할머니도 위로하고 쑥뜸 떠주고 음식도 드리곤 하였다. 언니는 성모님 군단인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었으며, 참으로 레지오를 사랑하였다. 돌아가신 후 정리해 보니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구호단체에 회원으로 조금씩 성금을 내고 계셨다.
SOS마을, 꽃동네, 결핵환자요앙소, 나환자촌을 비롯하여 그분의 숨은 손길이 안간 곳이 없었다. 그 없는 돈을 쪼개고 쪼개서 나누어 가진 것이다.
언제부터 가셨는지 언니는 성 프란치스코 3회 회원이었다. 부산 돔항 맛세오 형제회 입회자 수련장이었다. 임종 때에 보니 성경도 신ㆍ구약 읽기도 몇번씩 끝난 노트가 있었다. 보통 때 그분의 행동에서는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우리 가족과 우리 형제들은 언니를 천사라 불렀다. 언니의 지나친 봉사-지팡이 짚고, 한손에 든 망태에 무얼 넣어서 산동네로 갖다 주는 것이 딱해 보여서『편하게 살지 왜그러세요?』그러면 정색을 하고 나를 꾸짖었다. 올바른 신자생활을 하라고 하며『하느님 최대의 관심사는 인간이야. 너는 건강과 돈과 시간이 있을 때 물질에 바칠 것인가? 생명에 바칠 것인가? 선택해야 된다 』고 말씀하셨다.
청소부집 처녀를 치료하며 종종 진말징씨 얘기를 하셨다. 『그분은 돈벌이 할 시간을 나에게 주셨어. 갖고 있는 기술로 치료해 주셨지 복음도 함께 말이다』내가 알기로 진회장님 가산 후 10번의 연미사를 드렸다. 임종 때까지 몇년동안 매일 연도 바쳤으며, 다른 불쌍한 연옥 영혼들도 구해 주시라 기도하였다. 언니가 소속된 레지오는 부산 중앙성당 바다의 별「쁘레시디움」이다. 밤에 모인다. 낮에는 시장에서 일터에서 모두 일하고 오후에 모이는 팀이다. 천재적인 풍부한 아이디어와 손재주가 있는 언니는 연종친목회 때면 빛을 발했다. 그림 그리기, 연출, 각본을 쓰곤 했는데 가끔 1등을 하곤 했다. 언니는 얼마나 성모님 군단인 레지오를 사랑했는지 나는 언니가 병 들어서 여생이 몇 달 남지 않은 때 겨우 그 뜻을 알아들었다. 성모님 군대가 얼마나 훌륭하고 멋진 것인지, 얼마나 큰 은혜를 받는 지 모르는 신자가 많다.
바다의 별 쁘레시디움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언니는 자기방에서 주회를 한다고 자랑하였는데 가난한 산동네라 언니집이 좋아서 그곳에서 모이는 줄 알았다. 나는 언니 임종 후 처음으로 언니단원들이 모이는 집을 방문하였는데 그곳은 다시 찾기 어려운 미로가 겹친 산중턱이었다. 그 동네에 많은 분이 살고 있었으며, 언니집까지는 저녁일을 마치고 다시 걸어와야하는 불편한 장소였던 것이다. 다만 언니를 사랑하고 언니 다리가 불편하다고 단원 모두가 각자의 불편을 성모님께 바쳤던 것이다.
언니 단원 중에 한바울이라고 하는 노상 커피장수가 있다. 하루종일 서서 뛰어다닌다. 차가 오면 비키고,「커피」하고 부르면 뛰어간다. 다리가 무쇠인 것처럼 쓰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분은 특별이 언니를 사랑해 주었다. 밤늦게 일 마치면 고단하고, 아이들 기다리는데도 명절 때나 무엇이 좀 생기면 언덕을 넘어 갖다 주고 위로하였다. 또 소피아라는 분은 파출부 일로 바쁘신데도 점심시간에 잠깐 뒷뜰에 새로 돋는 쑥을 뜯어와 국을 꿇여 병중에 위로해 주었다. 나중에 만나보니 강한 호남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배운 것 없고, 돈 없고 혼자 사는 이 분의 비단결 같은 마음씨, 깨끗한 사랑은 주님 안에 한 형제됨을 웅변적으로 말해 주는 것 같다. 이렇게 산 동네의 레지오군단의 기수들이 힘을 모을 때 멀게만 느껴지는 남북통일도, 미움도, 전생도 다 없어지고 이 땅에 평화가 올 것 이다.
레지오 단원의 숨은 선행과 덕행을 어찌 일일이 밝힐 수 있으리오. 돋보이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어 지금이 순간에도 곳곳의 어둠을 밝히고 있다.
나는 항상 언니의 영적지도를 받아왔다. 후에 알고 보니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지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언니는 프란치스꼬 3회 입회자 수련장뿐만 아니라 방황 하는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수련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해 나는 언니의 많지 않은 재산을 맡아서 늘린다고 남에게 빌려주어 몽땅 잃은 적이 있었다. 돈 가져간 사람이 사업에 실패한 것이다.
나는 이 일로 얼마나 속상하고 애썼는지 모른다. 누구나 돈 빌려주고 못받을 때의 아픔을 경험했을 것이다. 내가 애쓰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면서『잊어라 없던 것으로 해라. 주님께서 갚아 주신다. 나 네 집에서 먹던 음식 조금씩만 나누어주면 산다. 돈 필요 없다』그러면서 흥분하는 날 달랬다. 자기 돈이 몽땅 없어졌는데도….
언니는 비유를 들어서 알기 쉽게 얘기했다. 『도마뱀이란 놈은 잡히면 살기 위해서 잡힌 꼬리부분을 얼른 떼놓고 도망간다. 안 그러면 아이들에게 몸통 전부 잡혀서 시달려서 죽는단다. 지혜로운 놈이다. 네 모습이 잡힌 도마뱀 꼴이다 얼른 꼬리를 떼고 도망가라. 없어진 돈은 꼬리야. 살고 싶으면 떼어버려』
이렇게 몇번이고 타일렀다.
언니는 한국 순교 성인들께 기도하고, 특별한 공경심을 가졌다. 고인이 되신 후 짐을 정리하니 언니가 갔었던 국내 성지에서 밤톨 만큼씩 흙이나 돌을 주워서 싸고 성인의 행적을 간단히 메모하였다. 이것을 어떻게 하려 하셨을까? 언니는 자주 성인들 공경하는 얘기를 하며 현대는 그런 피흘리는 순교가 없다고 하지만 시대가 변해서 더 참기 힘든 바늘치명 시대니 잘 이겨야 한다고 하였다. 수도 없이 보일뚱 말뚱한 바늘이 온 몸을 찔렀을 때처럼 괴롭히니 잘 참으라고 하였다. 내가 성질이 급하고 인내심이 없어 걱정되었던 것같다.
잘 참는 것은 현대인들이 피흘린 우리 조상들, 자랑스런 순교자들의 뒤를 따르는 길이라 하였다. 생각해보니 언니가 어떻게 바늘치명을 받으며 살았는지 너무나 잘 알 것 같다. 우리 집에 오셔도 제일 맛없어서 밀쳐 둔 음식이나 찬 밥 남은 것을 들곤하셨다. 깜짝 놀라서 말리면『동항성당「사랑의 선교회」수사님들 음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고 하시며『내가 바칠 수 있는 희생은 이렇게 적은 것뿐이야 』그러셨다. 버리는 음식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해 주셨다. 그리고 다 함께 식사하지 않으면 크게 걱정하셨다. 공동체 생활이 무너지면 축복이 없고, 함께 공동기도 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퇴보한다고 주의해 주셨다. 그 후 우리가족은 함께 저녁기도를 한다. 밤12시라도 함께 모이기로 하였다. 처음엔 너무나 어려웠으나 지금은 단 한사람이라도 성모상 앞에 앉아 기다린다. 이제는 손님이 오셔도 우리와 같이 저녁기도에 참석한다. 언니가 제일 싫어한 것은 서로 미워하여 다투는 것이었다. 어른이든 아이든 절대로 큰 소리로 싸우지 못 하게 했다. 이성을 잃고 서로 미위하면서 싸우면 유감이 들어와 죄중에 살게된다고 했다. 아무리 언니를 괴롭혀도 언니는 다투면서 싸우지 않았다. 성 프란치스꼬의 제자답게 항상 검소한 옷으로 만족했으며, 겉치레에 너무 빠지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그러고 임종하시기 3개월전인 4월 모임에서 프란치스꼬 3회 입회자들 위해 끌까지 참석하여 그의 의무를 다하였다.
임종이 가까울 무렵 우리 아이들이 철없이 이모님을 위로해 드린다고 강아지를 사드렸다. 매일매일 눈에 띄게 힘이 없어져 가건만 사랑으로 아무 쓸모없는 그 선물을 받아들였다. 귀찮게 구는 개를 받고서 우리 아이들에게 말했다. 『이 개 이름은「겸손」이라 지어라. 겸손 앞에는 악마도 굴복한다. 너희들은 이 세상에서 제일 힘센 무기인 겸손을 가져야 한다』하면서 마지막까지 아이들에게 일러주셨다. 사람들은 개이름치곤 너무 고상하다고 웃는다.
1988년은 교회에서 성모성년이었다. 언니는 8월 9일 성모성년이 가기 전에 자기 방 앞에 베란다를 달아내고, 성모동굴을 만들고 성모당 축성식을 가졌다. 10개월에 걸쳐 손수 시멘트나 모래를 조금씩 낱라다 동굴을 만들었다. 콘크리트 바닥에 흙을 날라서 꽃을 심어 꽃밭을 만들고 꽃동산에 온 것같이 만들었다. 모두 깜짝 놀랐다.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이런 일을 끝냈는지 정말 놀랐다. 동굴을 쌓을 때 돌이 무너지고 떨어질까봐 주모경을 비치고、겨우 손을 떼면 무너지지 않았다고 했다. 정말 아름다운 성모당이다. 언니는 이 많은 꽃들과 성모님과 같이 천당에 그대로 옮기고 싶다고 했다. 성모님께 우리 6남매와 그 집에 사는 모든 가정과 그 집을 방문하는 이들을 봉헌하였다. 축성식 하는 날 바다의 별 단원들이 오고 길반석 신부님의 미사와 축성이 있었는데 일생동안 이렇게 기쁜 날은 없었다고 했다. 언니의 성모님께 대한 사랑은 극진 하였다.
아름다운 성모당이 완성된 후 꼭 11달만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임종 후 많은 교우들이 와서 끊임없이 연도해주셨다. 어느 신부님의 장례식 못지않게 거룩하였다. 성당 안이 꽉 차게 많이 오셔서 조의를 표하였다. 중앙성당의 연도회 회장님인 염 회장님께서 끝까지 장례식을 주관 하셨는데 언니는 그 어느 단체의 회장님보다 제일 존경할 만한 분이라고 평소에 늘 말씀 하셨던 분이다.
언니의 관은 전부 생화꽃으로 덮였었다. 살아서는 가난한 생활을 했으나 주님은 당신 사랑하는 딸을 천상에서 맞는 날 아름다운 꽃들로 곱게 장식해 주신것 같다. 그 꽃은 어느 재벌부인이 많은 값을 치루고 선물해 주셨다. 노를담회 수녀님들도 전부 오셨는데 이것은 장례식이 아니고 축하식같다고 하셨다.
레지오 단기가 성당 입구부터 제대까지 늘어서서 꽃관을 맞이 하여 레지오단가를 합창하였다. 프라치스꼬 3회 회원들은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참석해 주셨다. 어느 동정녀는『동정녀로 죽어도 이렇게 끝이 좋을 수 있구나』하며 부럽다고 했다. 밖에선『오늘은 누구 장례식이지?』하니까『몰라요. 대단한 사람이래. 보통사람 아니래』라는 말도 들렸다. 초복의 더위에도 장지까지 많이 오셔서 기도해 주셨다. 도시락 1백60개, 친구들이 부조한 과일과 고기와 떡도 많았는데 다 쓰여졌다. 유택도 바다가 보이는 너무나 좋은 곳이었다.
나는 참기 어려운 슬픔 중에서도 언니가 천당에 가시게 된 것 이라고 확산케 되었다. 「이럴 수가 없다」하며 속으로 감격하였다. 언니 임종 후 제부되는 아타나시오는 나에게`『당신은 울기만 해』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상가일을 했으며 손수 관을 들고가서 고이 묻어 주었다. 삼오날, 언니 3세트의 하나인 의족을 고이 안고, 산소에 가서 불살랐다. 장례가 끝난 후 집에 돌아와서 마음 깊이 우러나는 감사와 사랑을 아타나시오에게 고백하였다. 생각해 보니 언니 가실 때 까지 남편은 한번도 언니 때문에 싫은 기색을 한 적이 없었고, 헌신적으로 도와 주었다. 참으로 고맙고 훌륭한 남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도 언니가 나에게 남겨 준 사랑의 선물이라 믿는다. 언니 임종 후 백날 되는 날 상을 벗었다.
그런데 참으로 고마웁고, 기적 같은 일이 있었다. 백일 동안 언니 방에서 오후 5~6시 사이에 동네 교우들이 매일 오셔서 연도하고, 묵주기도를 하셨다.
어느 자식이 이렇케 할 수 있으랴! 임종전에는 제자 세라피나의 극지한 섬김도 받아 기뻐하셨고, 친구 막달례나와 데레사할머니께서는 임종 때 함께 해주셨고, 모든 조카와 평소에 그리워하던 모든 이를 기쁨 속에서 상면하셨으니 이 또한 어찌 큰 축복이 아니리오! 4번 입원하고, 퇴원하고, 수술하였는데 메리놀병원 원장신부인 윤 신부님은 경제적으로 많이 도와주셨다. 그 중에서도 병발부터 임종 직전까지 언니 아랫방에 사시는 데레사할머니께서는 언니의 전신을 사랑의 손길로 만져주시며, 고통을 없이 해주셨으니 하느님의 딸이 아니라면 이런 사랑을 어찌 받을 수 있었으리오!
아실 길을 예비하신 언니는 넝마같은 이 세상 것 다버리고 영혼을 정화하고 정리 하셨던 것 같다. 나에게 보낸 마지막 펀지도 정리된 틈에 조심스레 끼여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시랑하는 나의 마리아 데레사야! 때때로 너와 마주 앉아 서로의 종말에 대해서는 많은 얘길 나누었지. 누가 선후가 될 지 모르는 그날에 서로가 어떻게 그 뒤를 깨끗이 정리해 줌으로써 마지막 사랑을 다 할 수 있겠는지를…. 마리아 데레사야! 그런데 바로 지금이 그 순간이 되었구나. 그동안 너의 생활 속에서 못난 언니를 위하여 무던히도 애썼다. 마지막으로 너에게 할 말은…단 한 마디…『고맙다』부디 남은 생을 깨끗이 살다가 하느님 앞에서 만나기를 바랄 뿐이다. 그 말 밖엔 할 말이 없구나. 너는 나의 동생이기 보다는 언니、어머니 그리고 또 나의 스승、수호자의 구실을 한 사람이지만 나는 의기양양하게 언제나 네게 대했었지. 네가 잘 나서 나를 도와 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내 편이라 네가 나를 도와 준 것이라고…. 마리아데레사야! 생전에 네가 알아서 돌봐준 것처럼 나보다 네가 나를 더 잘 알 것이니 알아서 정리 해주길 바란다. 어릴 때부터 못난 언니를 엄마처럼 주위를 맴돌면서 애정 깊게 돌봐 준 사랑하는 동생 마리아 데레사야! 고맙고 미안했다. 못난 언니때문에 활기롭게 살아보지 못했을 너에게…』
훗날 떳떳하게 만날 수 있도록 언니가 나에게 꺼내도 줄어들지 않는 큰 보물창고를 남겨 주셨으니 남은여생 언니 뜻대로 낮게 낮게 살다가 언니 계신 천당으로 다가 가리다.
고생많았으니 천당에서는 만복을 누리소서. 사랑하는 나의 벨라뎃다 언니여!
■ 당선소감 - “크나큰 은혜 베푸신 주님께 감사”
신앙수기가 가작으로 당선되어 시상식이 있으니 7월 19일 신문사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믿기엔 너무나 공교롭게도 작년 7월 19일 벨라뎃다 언니의 장려식이 있었습니다. 슬픔과 기쁨이 교차되는 가운데 크나큰 위로를 주시는 사랑이 많으신 우리들 모두의 주님께 감사를 드릴뿐입니다.
지금은 언니가 천당에서 성모님과 아주 가깝게 계시면서 세상살 때의 눈물도 고통도 슬픔도 없다고 확실하게 나에게 그리고 언니를 사랑하던 모든이에게 알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부족한 글솜씨를 사랑으로 끝까지 읽어주시고 뽑아주신 신문사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짧은 글이라 많은 은인들의 사랑을 다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 유감입니다.
다 쓸 수 없었으나 언니의 평생동안 알게 모르게 사랑을 베풀어 주신 모든 은인들께 깊이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숨은 것도 다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다 갚아 주시리라 믿습니다.
영적으로、이기적이고 교만하고 성질 급하고 갖은 결점 투성인 나와 천사같은 품성과 덕행을 은혜로 주셨으나 육신의 장애자인 언니와의 평생동안의 삶을 통해서 주님은 당신의 오묘하신 사랑의 섭리를 들어내셨습니다. 육신의 장애자에게 영적으로 타락된 영혼에게 우리모두에게 언니의 생애가 희망의 빛나는 불빛이기를 빌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 글을 썼습니다.
사랑이신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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