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추계주교회의가 대림 제3주일을 「자선주일」로 정한 이래 금년으로 제8회 자선주일을 맞게 되었다. 자선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뜻이다. 불쌍한 사람들이란 인간다운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인간은 물질적 존재이며 정신적 존재이며 동시에 영적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다운 생활이란 물질적ㆍ정신적ㆍ영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뜻한다. 그러나 인간은 선천적ㆍ후천적으로 능력의 차이가 있어 이러한 각 방면에서 인간다운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이럴때 능력이 우수한 사람은 부족한 사람을 도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선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자선행위를 보시행(布施行)이라고 한다. 다양한 보시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을 다음세가지로 든다. 즉 재시(財施), 법시(法施), 무외시 (無畏施)가 그것이다. 물질적 나눔을 재보시라 하고, 영적 나눔을 법보시라 하고, 정신적 나눔을 무외시라 한다. 자선주일에 우리 교회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재보시 즉, 물질적 나눔이다.
자선은 인간사회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산업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야기된 다수의 빈곤자들이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데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하는데 자선주일 설정의 목적이 있다. 따라서 자선은 교회의 사회교의(社會敎義)와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는 것이다.
빈곤문제는 아마도 인류의 역사와 함께 있어 왔는지도 모른다. 또한 인류역사의 종말까지도 존재할런지도 모른다. 그것은 세상의 재화는 유한한데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빈곤의 책임이 개인에게 있느냐 사회에 있느냐 하는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책임을 크게 보고 사회주의에서는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빈곤정책도 각각 다르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고 사회주의는 사회적 평능을 내세운다. 공산주의는 불평등의 원인이 사유재산권 때문이라고 보고 재산을 사회가 공동소유 공동관리해야 평등이 이루어지고 평화와 행복이 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붕괴되고 이제 설득력을 잃고 말았다.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가 발붙인것은 결국 자본주의가 자체 모순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최대 결함은 소수의 부자와 다수의 빈자로 사회를 양분한다는데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약점을 보완하면서 성장과 발전이라는 자본주의의 장점을 지켜보자는 주장이 사회복지주이다. 이렇게 보면 사회복지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절충주의다. 자본주의는 자유를 옹호하고 사회주의는 평능을 강조한다. 사회복지주의는 결국 이 양자의 적절한 조정을 꾀해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평등을 바라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인류 비극의 씨앗인지도 모른다. 자유와 평등은 상호모순개념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평등의 실현은 각자 자유의사로 자기의 가진바를 이웃과 나눔으로써만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사회사상도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책임의식과 함께 민간의 자발적인 참여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개인의 자발적인 나눔이란 결국 자선을 말하는데 이러한 자선의 가르침은 종교사상에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제 우리 천주교회의 자선에 대한 현주소를 돌아 보고자 한다.
첫째, 신자들의 자선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자선은 우리의 의무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 (마태오 25,40)이라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선을 바로 심판의 기준으로 삼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솔선수범을 하셨다. 이러한 자선의 가르침은 초대교회 교부들을 통해 계속 강조되었고 증세·근세를 거쳐 현대교회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음은 교회의 역사가 잘 말해 주고 있다.
둘째, 교회공동체가 자선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종교단체가 갖고있는 부(富)는 막대하다. 그러면서도 사회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지 않는다는 비판의 소리가 높다. 그래도 천주교가 비교적 낫다는 평을 듣지만, 아직도 우리 교회는 너무 부자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십일조를 강조한다. 십일조는 야훼의 것(레위 27,30)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일조를 야훼께 바쳤고 야훼는 거둔 십일조 전부를 레위 후손에게 주셨다 (민수18,21). 야훼 하느님께 서는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떼어 야훼께 바치기를(민수18,26) 요구 하셨다. 즉 교회는 순전히 야훼의 몫으로 십일조를 바쳐야 하는 것이다.
야훼는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은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은 「우리 형제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아니냐! 그렇다면 교회는 십일조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려 주어야 한다.
셋째, 교구와 본당 상호간에 부(富)의 흐름이 있어야 한다. 교회내의 부의 불평등이 너무 심하다. 교회가 재벌의 돈주머니를 풀어 헤치라고 외치면서도 교회의 돈주머니는 움켜 쥐기만 한다. 가난한 시골 교구의 살림 규모가 대도시의 본당 살림 보다 적다. 같은 레위의 후손들 끼리도 생활형편의 차이가 너무 크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공적으로 신자들에게 솔선수범 해야한다.
결론적으로 우리 모두는 초대교회의 모습(사도행전2, 44~47)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사랑으로 가진바를 나눔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만이 인류 구원의 길이요 하느님나라가 이땅에 일하시는 모습일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