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아버님의 산소가 있는 고향을 다녀오는 길에 읍내 군청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마침 농민들이 쌀수매가에 대한 반대 데모가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었고, 이를 막는 경찰과 심한 몸싸움으로 양쪽에서 수십명의 부상자가 나는 장면을 목격했다. 마침 국회에서 쌀 수매가가 결정된 직후였고, 농민들은 쌀 전량수매와 농자금 현물상환 등을 내걸고 결사적인 시위를 벌이고 있으며 당국에서는 이를 원천봉쇄하는 방침인것 같다.
그러면 왜 농민들은 이렇게 결사적으로 들고 일어서는 것일까? 본래 농민들은 순하디 순한 양과 같다. 다른 기업체에서 근무하는 산업전사들과도 다르고 무슨 단체나 노조나, 조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이 이렇게 일어서는 것을 보면, 너무나 절박한 이유가 있는 것이며, 정부에서는 이런 행위를 막는 것만이 농사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농민들의 어려운 실상을 파악하고 그에 대처하는 자세를 가져야만 되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서 아버님 산소를 다녀오는 길이었지만, 늘그막에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농사일로 보내시다가 돌아가신 아버님생각을 하게되었다. 가난한 봉급쟁이 아들한테 얹혀 사는것이 큰 부담이었던 부모님은 10년전 내가 서울에서 전주 본사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서 곧바로 시골에 가서 자리를 잡게되었다. 몇평 안되는 밭과 논이 딸린 농사일이지만 그분들에게는 우선 자식 · 며느리 눈치 안보아서 좋고, 자유스러워 마음이 편할것이라 생각됐지만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속에 익지않은 농사일이 너무나 고되고 힘이 드심을 알수 있었다. 한달에 한두번씩 시골에 가보지만 그때마다 더욱 늙어보이셨고, 손에 익지않으니 더 힘들어 보이셨으며 얼굴은 별에 그을려 잔주름이 더욱 깊이 패이고, 깡마르셨다. 지금 생각하면 막심한 불효가 아닐수 없다. 생계를 꾸리는 농사일도 아니니 소일거리로 알고 슬슬 일하시라고 해도 어른들은 어디 그렇던가? 농사교실이라는 책까지 열심히 읽으시면서 일에 열중하셨다.
몇가지 생각나는 일이었다. 10년전 도시에서만 사시다 처음 시골에 자리잡던 해였다.
그해 여름 곳간에 잠실(누에방)을 정돈하고 누에를 기르시기로해서 누에 두장을 사다가 놓았다고 두분이 자랑이 대단하셨다.
누에 한장이 책받침 크기라고 하니 두장쯤이야 대수로운 일이 아니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한달쯤후에 시골에 가 나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두분이 다 지치고 시달려서 마치 얼이빠진 꼴이었고 잠실에 가보니까 열평이 넘는 방안에 층층이 칸막이로 놓인 누에들이 뽕잎을 먹는 소리가 아삭아삭 나고 있었다. 두분은 교대로 매일같이 밤잠도 못자고 뽕잎을 따다가 대는것이 일과였다는 것이다.
당초에 동네사람들은 누에 반장정도만 했는데 두분은 『늙은이가 하루종일 할 일이 뭔데 그까짓걸 못기르겠느냐』고 욕심을 냈던 것이고, 결국 백일후에는 거의 그로키상태에까지 몰렸고 그 소득은 누에꼬치값으로 겨우 60만원정도였던 것이다. 한번은 또 한참 농사일손이 바쁠때인데 어머님이 전주에 오셔서 3일씩이나 묵은일이 있었다. 모처럼 오시더라도 하룻밤 겨우 주무시고, 손자들이나 보시면 내처 가시던분이 말없이 3일씩이나 묵으시니 이상한 일이 아닐수 없었는데 사흘째 되던날 아버님한테서 며느리에게로 전화가 와서 비로소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그 해에 4백여평되는 밭에 수박농사를 했던것인데 여름장마가 들어서 수박은 크지도 않고 큰 고통이었다. 그럴때 밭뙈기군(밭을 통째로 계약하는 업자들)이 와서 흥정을 붙였는데 너무나 값을 후려친 것이다. 아버님은 화가 나서 수박을 밭에서 썩히는 한이 있어도 그들한테는 팔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 어머님이 보니 다른 사람들도 다 그 값으로 그들한테 계약을 하는 것이었고 이대로 장마가 계속된다면 수박농사를 그나마 망쳐 큰일이다 싶어 슬며시 밭뙈기군을 불러 계약금을 받고만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다음날부터 장마가 걷히고 수박값이 껑충 뛰어올라 손해를 보게된 것이고, 그일로 두분은 대판거리 입싸움을 하게되었고 급기야 어머니는 아들네집으로 뛰쳐나오게 된것이다. 이전쟁은 며느리의 중재로 화해를 했지만 한여름철 고생한 그분은 결코 투기군들을 용서하지는 않았다.
김장배추나 무우는 또 어떤가. 어느해 가을에 그냥 밭에다 놓은 채 뒤짚어 갔을때도 있었다. 밭농사는 벼농사보다 손발이 훨씬 많이 가고 힘드는것이고 속도 많이 상한다며 밭을 논으로 만드셨는데, 마치 되팔아 말을 산 꼴이 되었다.
왜냐하면 요즘에는 논보다 밭이 값이 더 나간다고 하니 천천히 손해보는 일만 하신것이다.
어느해는 한 낮이 되어서 직장에 아버님이 찾아오셨는데 큰 트럭에 쌀 스무가마를 싣고 주차장에 세워놓으셨다. 공판장에 나가서 등급따지는 것 보다 차라리 친구들과 나누어 먹고 그것이 추곡수매장에 내놓은것보다 훨씬 마음이 편하신 모양이었다. 아버님은 농사군으로 적응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결국 농사군은 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아버님이 사시던 시골동네는 20여가호에 인구 열아홉명이고 빈집이 네채나 된다. 일할 젊은이는 한사람도 없고 51살먹은 사람이 제일 어리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제일 기름지고 넓은 들판을 자랑하는 호남평야, 수평선과 지평선이 맞닿는곳 금만(金灣 ·萬涇)옥토가 지금 이렇게 시들어가고있다. 농민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해마다 오히려 더 쪼들려만 간다. 그러니 자연히 농촌을 등지고 도시로만 나가게 된다. 이대로 농촌을 망하게 내버려둬야 될것인가. 위정자들은 복지농촌건설이라고 입만 열면 농촌을 잘살게 하겠다고 하지만 추곡수매 보전이나 농가부채 삭감으로 농촌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우루과이 라운드나 쌀시장개방압력이 어느때보다 강하게 밀려오는 판에 정부는 어떻게 대응할것인가.
경운기에다 쌀을 잔뜩 싣고 격렬하게 시위하는 농민들과, 이들 막는 경찰관, 이런식으로만 문제를 풀어야 하는가? 이는 이미 농민들만의 문제도 아닌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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