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진리는 영원하다.
누구라도 진실을 덮을수도, 가릴수도 없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는 것과 같다. 역사와 민중을 거역하는 것도 잠시, 언젠가는 실체와 진상을 속속들이 드러낸다. 성서에도『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고 했다.
지난해 5공청문회가 열릴 때 온 국민들의 시선은 TV앞에 쏠려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독재정권의 비리가 하나하나 밝혀지는 것을 보느라 밤잠을 설쳤다. 영원히 묻힐 줄 알았던 사건들이 양파껍질 벗겨지듯 하나 둘씩 드러날 때 국민들은 분노에 치를 떨면서도 진실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 뒤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있었고 언론통폐합, 12ㆍ12사태, 삼청교육대사건, 일해재단 등 흑막에 싸여있던 것들이 베일을 벗고 미흡하나마 역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복마전같은 5공시절의 각종 비리ㆍ부정들이 백일하에 세상에 드러나게 한 것은 바로 국민의 힘이었다. 그 힘의 원천은 역사적 진실을 신뢰하는 국민들의 의지가 아니었던가.
지난 87년 서슬퍼런 절대권력이 날뛰고 그 누구도 진실의 입을 열지못하고 있을 때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실을 증언했다. 참으로 용기있는 결단이요, 행동이었다.
당시 우리사회는 한마디로 공포분위기였다. 권력은 진실을 은폐하기 바빴고 부정과 비리가 판을 치고 있었다. 민중들은 진실에 목말라있었지만 그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이때 두려움을 떨치고 독재정권에 맞서 당당히 진실을 증언한 이 사건은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기에 충분했다. 이것이 도화선이되어 6ㆍ10민중항쟁의 승리를 이끌어 내지 않았는가.
국민들은 이를 계기로 역사에 대해 더 큰 신뢰를 가지게 되었으며 진실은 항상 정의의 편에서며 또 그것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역사의 인물들을 보자. 고난을 무릅쓰고 진리를 증언해 진실을 밝혀내고 역사의 지평을 더 넓힌 선각자들이 많다. 「부분」은「전체」를 증거한다는 가정하에 몇가지 예를 보자.
15세기 이탈리아 출신 탐험가 콜럼부스는 당시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인도에 대한 꿈에 부풀어 있었다. 지구가 둥글다는 콜럼부스의 확신도 당시 그의 조국에서는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천신만고 끝에 그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이사벨여왕의 조력을 받아 가까스로 항해를 할 수 있었다.
1492년 10월 18일 오전2시.
모진 고난과 풍랑을 이기며 항해한 끝에 도착한 곳은 본래 꿈꾸던 인도가 아니라 아메리카였지만 그의 꿈은 마침내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어떤가.
당시 유럽의 사회분위기는 감히 지동설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천동설이 확고히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사고의 구각을 깨고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사실을 온 세계에 밝혔고 이후 케플러 갈릴레이 뉴톤 등으로 이어지는 학자들에 의해 입증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민중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안중근의사도 하얼빈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총쏘아 죽였을 때 국민들로부터는 가슴으로부터의 박수를 받았지만 천주교계로부터는 오히려 배척당했다.
여기서 당시 거사를 치르고 일본 경찰에 붙잡혀 재판을 받게 됐을 때 재판부의 신문내용을 상기해보자.
-재판관: 그대가 믿는 천주교회에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겠지.
△안중근: 그렇다.
-재판관: 그렇다면 인도(人道)에 반한 행위를 한 것이겠지.
△안중근: 성서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라고 나와있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하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한다는 것은 더 큰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한 것이다.
안의사는 이후 사형이 언도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됐을 때도 천주교계의 반응은 의외로 냉담했다. 안의사가 사형을 당하기 직전 고백성사를 준 신부도 교계의 징계를 받았고 평신도들 역시 안의사를 외면했다.
그러나 안의사의 숭고한 뜻은 역사 속에서 더욱 빛났다. 당시 안의사의 행동은 우리 국민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으며 여기에 자극받아 더욱 가열찬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지난해 명동성당에서 안중근의사를 위한 추도미사가 올려졌다.
이 땅에 천주교가 전래된지 어언 2백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궁극적으로 온 세상에 성령으로 역사하신 하느님의 섭리요 연관이었겠지만 천주교신자이기에 겪어야했던 핍박과 수난은 실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진리의 복음을 끝까지 전파했던 신앙의 선조들. 오로지 하느님을 믿는 그 믿음 때문에 하나뿐인 목숨을 바친 순교자의 숫자는 또 얼마인가.
교황께서도 지난 84년 1백3위 순교성인 시성식에서 복음을 전파하다 순교한 이들을「오늘날 한국에서 교회가 그처럼 훌륭히 꽃피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순교자들의 영웅적 증거의 열매」라고 칭송했던 것을 기억하리라.
어떤 시대에는 돌팔매질을 당하고 박해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의롭게, 외롭게 쓰러져간 수많은 복음의 선각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심지어 교회내에서까지 외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가 막을 내리면 박해받던 지도자ㆍ순교자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으며 역사 속에서 부상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진실을 밝히려고 자기몸을 불사르는 이런 사람들에 의해 우리역사는, 그리고 가톨릭은 발전해왔다.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전한 복음이 바로 오늘의 가톨릭의 영광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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