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主義)」란 말이 너무 딱딱해서 마음에 안 들지만「정신(精神)」쪽을 강조하고 싶은 생각에서 그냥「정신주의(精神主義)」라고 해 보았다. 그렇더라도「정신주의(精神主義)」가 뭐냐 하고 되물으면 나는 이 말을 엄밀하게 정의할 능력이 없다. 우선「정신(精神)」이란 말하나만 하더라도 그 안에 엄청나게 많은 어려운 문제가 들어 있을 터이니 말이다. 다만 여기서 써본「정신주의(精神主義)」는 무슨 학문적 철학적인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순전히 우리가 하루하루를 생활해 나가는 경우를 염두에 두고서 하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정신주의」가 어떠한 것인가를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말할 것도 없이「정신주의」는「물질주의(物質主義)」와 대립되는 생각이며 그러한 생활태도를 말한다. 오늘날 우리의 많은 불행과 사회적 문제는 우리가 너무 물질적인 것에만 마음을 써온 나머지 우리가 물질의 주인이 아니라 되려 그 노예로 전락해 버린데서 연유한다고 여겨지며, 따라서「정신주의」는 우선 우리가 물질에 대한 주인다운 주인의 자리를 되찾자는 것을 그 목표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정신주의」를 반드시「물질주의」와의 대립적인 관계에서만 생각할 일도 또한 아니다. 「정신주의」란「정신적인 것」자체가 좋은 것이기 때문에「물질적인 것」과는 관계없이「정신적인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생각이기도, 하다. 예컨대 성경에 있는 대로「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면 그것은 매우 훌륭한 정신주의적인 생활의 표본일수 밖에 없다.
삶의 보람을 마음안의 평화와 사랑에 둔다면 그것도 훌륭한 정신주의적인 자세라 할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보통으로 말하는「믿음의 삶」을 약간 세속화해서 표현해 본 것이 바로 이「정신주의」란 말이 되겠는데, 그럼 왜 평범하게「믿음의 삶」이라고 하지 굳이 딱딱하게「정신주의」란 말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방문이 나올 수 있다. 실은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본다.
단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교회가 사회 안에서「소금」의 구실을 충분히 해 내고 있지는 못하다는 말이 된다. 믿음의 차원에서 하는 말은 그것이 진리이기는 할지라도 아직까지 우리 사회 전반에 통용되는 보편성을 얻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같은 뜻이라도 세속적인 표현 쪽이 덜 생소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왕왕 있는 것이다.
「정신주의」적인 생활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얘기를 할까 한다. 오늘날 사치와 낭비가 망국적인 징후로서 자주 지적되곤 한다. 지각있는 사람이 심히 개탄하기도 한다. 사실 사치스런 생활을 끊고 검소한 생활을 하는 일은 두말 할것도 없이 훌륭한 정신주의적인 생활이다. 그러나 신문이나 매스컴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일부의 우국지사가 아무리 땅을 치며 개탄을 해도 사치풍조는 도무지 수그러들 낌새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만연하는 기세를 보이고 있다. 사치와 허영과 향락적인 작태가 비판과 훈계와 개탄만으로 사라질 수 있다면 처음으로 그런 문제가 불어나지도, 또한 심각한 문제로 불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허영과 사치가 열병처럼 퍼진다는 것은 그런 것을 은근히 부러워하고 바라는 마음이 너 나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증거하고도 마치 거울안을 들여다 보듯 명확한 증거이다. 요컨대 모든 사람 마음안의 가치관의 문제이다.
원래 허영가는 남의 눈을 의식하는 법이다. 터무니없이 비싼 옷을 입고, 외제차를 타고, 비싼 음식 비싼 물건만 찾아 다니는이가 증가일로에 있다면, 그것은 그것이 좋아 보여서, 「나도 한번 저렇게 해 봤으면!」하는 사람이 주변에 그렇게 많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 사람을 보고 주변의 사람들이 부러워하기는커녕「여기에 정말 민망한 광경이 있구나!」하고 느끼며, 돌아서서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라도해 주고 싶어지는 사람들이 (왜냐하면 겉으로 번쩍번쩍하는 사치처럼 천박하고 추악한 것이 없기에) 압도적으로 많아진다면 그런 허영가들이 슬며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8ㆍ15해방 후에「모리배」라는 말이 크게 유행했었다. 부정한 방법으로 벼락부자가 된 자를 이르는 말이었다. 모두들「모리배」를 놓고「도둑 놈, 죽일 놈」하고 욕을 했다. 그런데도「모리배」는 늘어만 갔다. 이것은「도둑놈」소리를 듣는 것과 한번 부자가 되어 보는 일 중에서 전자의 경우를, 즉「도둑놈」소리를 들어도 좋으니 부자 소리를 한 번 들어 보는 쪽을 선택한 사람이 그만큼 많았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사정은 오늘날도「해방」직후와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남달리 큰 돈을 모은다는 것이 그리 쉬울 리가 없다. 성실하게 피땀을 흘려서 돈을 번 사람이라면 그렇게 호화찬란하게 (유치하게) 사치행락을 할 리가 없다.
오늘날 마구 헤프게 돈을 뿌리며 허영과 사치를 주변에 과시하는 사람들은「나는 어쩌면 도둑입니다. 그러나 부자 입니다」이렇게 얼굴에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다. 그게 그렇게 보기가 좋을까! 그러나 그런 사람이 자꾸 늘어나는 것을 보면 그런 사람이 좋아 보이는 사람도 그만큼 많다는 말이 된다.
훈계와 우려와 비판만으로는 이런 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관의 문제이다. 우리는 오랜 시간을 두고 성실하게 실행해 나아가는 참된「교육」에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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