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깊지 못하여 이런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겠지 하면서도 십자고상을 볼 때 마다 마음속에 불편한 점이 있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기도 할때마다 고상을 우러러 보고 있노라면 그 형태가 각기각양이라 내 나름대론 갈등이 새이겨 고상 파는 곳을 몇군데 둘러 보았으나 끝내 마음에 드는 것을 찾지 못했다. 어떤 것은 양팔이 약간 늘어져 머리를 오른쪽 팔에 기댄 것도 있고 잎으로 숙인 것도 있으나 그래도 형체가 꼿꼿하게 매달려 있다.
또 머리가 아예 십자가의 가로선 아래로 쳐져 팔은 완전「V」자형으로 축 늘어져보기 안스럽고 측은 하게 보이는 것도 있다. 또 발이 포개어져 못박혀 있기도 하고 가지런히 각각 못박혀 있는것도 있다. 다리와 정갱이가 옆으로 비스듬히 뉘어져 있는가 허면 직선으로 쭉 뻗어 있는 것도 있다. 이렇듯 그 형태가 각양각색이다. 이는 물론 만드는 사람의 영감이나 조각술의 표현방법에 따라 달라 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는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과는 그 뉘앙스를 좀 달리한다. 고상은 수많은 신자 혹은 비신자까지 우러러 보는 상징적 조각물로서,인류의 고통을 대신한 성스럽고 의연한 존경의 대상이 되는 하나의 「징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드는 사람의 느낌대로 또 표현능력의 차이에 따라 그냥 세상에 발표되기 보다는 어느선 까지는 정립시켜 내놓게 함이 어떨지? 이는 나혼자 만의 욕심일수도 있을테지만…지금 투병중인 사람,직접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하루에도 수십번「고상」을 우러러 보며 주님의 은총을 간절하게 구한다.
힘없이 축 늘어져 보는이로 하여금 용기를 되려 잃게 하는것이 있는가 하면 비록 손발이 못박혀 있으나 의연하고 당당히 고통을 초월하여 초연한 자세를 보이고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용기와 신념을 주는 것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에겐 가능하면 후자의 경우가 얼마나 희망적인가. 그러므로 고상의 형태도 교회적 차원에서 어느 정도는 정립하여 세상에 내놓을수 있게 할 수는 없는 것인지? 위와 같은 특별한 경우의 절박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고통을 같이하는 배려를 베푼다는 뜻에서라도 그저 묵인되어 지나칠 문제만은 아닌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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