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가톨릭 신문의 무궁한 발전과 우려로 이 글을 씁니다.
저는 영세받은지 34년이 되었으며 한 가정의 주부로서 조그만 중소기업의 사장으로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안에서 능력껏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부들의 말씀을 법으로 알고 지키려고 노력하며 제 나름대로는 양심을 지키며 작은 제주위나마 정화한답시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소시민입니다.
요즈음같은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무엇이 잘못되고 잘된것인지 어떤 것이 진실이며 왜곡보도된 것인지 짚고 넘어갈줄 아는 양식도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저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보지않을래야 보지않을수없는 사회신문과 TVㆍ라디오ㆍ만나는 이를 통해 비겁하고 지긋지긋한 정치인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자기가 아니면 지구가 거꾸로 돌아갈 것처럼 절박하고 욕심스럽게 구는 치졸한 인간들의 이야기를 밥먹고 살아야 하기에 어쩔수없이 보고 듣고 있습니다.
매주 금요일만 되면 퇴근하는 즉시 가톨릭 신문을 찾습니다. 무척 반가우니까요. 영적 생활에 필요한 말씀들, 교회 내외의 소식들, 신문에서 형제 자매로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의 얘기를 읽노라면 밤 12시, 1시가 언제되는지 모르지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정치이야기가 조금씩 지면에 나타나 미간을 찌푸기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사제라는 단어는 예수님 다음으로 존경스러울진대 그 고귀한 낱말들이 정치이야기 다음에 공공연히 붙어 다닌단 말입니다. 누구누구를 지지한다느니 전면 부정선거라느니 정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가톨릭 신문이 정치의 장으로 사용돼야만 합니까? 그 지긋지긋한 문구들을 귀중한 가톨릭 신문에서 꼭 읽어야만 한단 말입니까? 우리의 사랑하는 사제님들은 권력의 이용물이 돼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제님들이 이렇게 큰 소리로「바람바」를 외쳐댈 때 가엾은 예수님은 말없이 또십자가를 지실 것만 같은 환상으로 미칠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매달수는 없지 않읍니까. 다친 상처는 건드릴수록 덧납니다. 가만히 치료를 하며 덧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 시대의 아픈 상처를 진실이랍시고 자꾸 파헤치는 것이 치료만은 아닙니다. 보복은 자꾸 보복만을 부릅니다. 정죄는 하느님만이 하시는 것입니다.
오염된 정치얘기가 아니라 알찬 예수님의 이야기ㆍ국내외의 교회소식ㆍ형제 자매님들의 사랑이야기만을 실어도 지면이 부족하지 않을까요?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