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4일자 가톨릭신문 5면에 실린 차정희씨의 글을 읽고, 공개편지를 씁니다.
이글은 한 개인의 신앙관이나 思考에 대한 문제제기라기 보다는 교회를 구성하고 잇는 모든 분들게 대한 提言이라는 측면에서 이해있으시길 바랍니다.
敎會와 政治에 대하여
인간생활의 거의 모든 부문에 영향을 주는 정치는 현대사회의 전문화 ㆍ 세분화된 많은 분야중에서 가장 밀접하고도 폭넓게 뒤섞여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사회의「공동선의 구현」이라는 목표를 향해 총체적으로 조성, 조성하는 기능인 정치는 본질적으로「사람」을 위해서 존재해야함과 동시에 그 시작과 궁극의 도달점에「사람」이 있습니다. 따라서 작건 크건간에 정치가 윤리적, 도덕적인 목적과 방법을 취하지 못하거나, 정치권력을 그릇되게 행사하게 되면 사람들의 공동체, 즉 사회에 엄청난 타락과 부정과 괴멸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사람」은 어떤 존재보다도 고귀하며 그 존귀함은 하느님께서 희망하시는대로 보호되고 성장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십자가의 수난도 그러한 하느님의 요구에 모든 것을 바쳐 응답하신 결과이고 그로인해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본질적 측면에서 볼 때 사람들의 생활에서부터 생명까지도 좌우할수있는 정치는 무엇보다 우선하는 관심과 사목의 대상일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의 입장은 일찌기「제2차 바티깐공의회」를 통해서 확인된 바 있습니다. 정치는 정치자체가 목적이 아니라「사람」에 대한 봉사가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사제의 정치참여에 대하여
현세에서 하느님을 대리하여 신자들의 영성생활을 보다 올바르게 현실 안에서 구현 시켜내고 비인간적 모든 현상들을 막아내는 일은 사제의 기본적인 직분입니다. 따라서 사제들은 정치상황에 대하여 누구보다 민감해야하고 폭넓은 상식과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살아있는 영성생활을 위해 신자들을 이끌어야 합니다.당연히 정교이분법적(政敎二分法的)인 사고는 배제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물론 전례나 성사활동을 뒤로 하고 정치에만 매달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기본이며 동시적으로 함께 입니다. 사제들은 아시다시피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삶 전체를 하느님께 봉헌한 분들 입니다. 그 분들은 그것을 지켜내고 더욱 발전시킬수 있는 충분한 교육과 영성을 갖추고 있음은 물론 사회의 어떤 분야에 있는 사람들보다 건전한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사제들은 귀하께서 염려하시는 것처럼 권력의 이용물이 될 정도로 우매하거나 또다른 목적에 세속적 욕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더우기 곁에 계신 예수님은 안중에 없이「바랍바」를 외칠정도로 본분을 망각했다면 사제생활의 엄격함과 직분상 스스로의 자괴심에 벌써 수단을 벗어던졌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제의 정치참여는 그것에의 관심과 참여로 예수께서 십자가에「두번 달리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에서의 외면과 무관심으로 인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직분을 포기함으로써「두번 달리시는」결과를 가져오는것입니다. 그러므로 귀하의 표현을 빌어 사제들의 정치참여로『예수께서 말없이 십자가를 또다시 지실것같은 미칠것 같은 환상』은 안가지셔도 될 것입니다.
다친 상처는 건드릴수록 덧난다는 견해에 대하여
우리 민족은 참으로 많은 상처를 받고 살아왔습니다. 수많은 외세의 침탈, 유린속에서 우리의 선조들께서 받으신 아픔과 상처는 실로 큰것이었습니다. 근간 논란이되고 있는 광주사태의 진상규명만 하여도 아직 그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고 분명 수많은 무고한 광주시민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누구하나 책임지는 사람도 없습니다. 귀하의 논리로 보면 경찰에 죄없는 학생이 끌려가 죽어나와도, 군인들이 국민을 향해 총을 쏘고 수없이 죽어가도, 제2·제3의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도 그냥 덮어두자는 얘기가 됩니다. 물론 귀하의 말씀대로 죄를 묻고 벌하시는 것은 하느님이십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손수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 안에 모이고 그 말씀을 실천함을 사명으로 하는 하느님의 백성 즉 우리들이 해야할 일입니다.
우리의 할일이란 그일을 저지를 사람을 찾아 단죄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구원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 구원은 익의세력과 손을 끊게하며 부정한 생각과 불의한 행동으로 하느님의 가르침에 역행하지 않게 함으로써 화해와 용서를 받음을 의미합니다. 참회하는 한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지만 참회없는 고백과 그것이 전제되지 않은 용서란 반(反)그리스도적 입니다. 때문에 진정한 구원과 용서와 화해를 위해서는 진실된 규명이 요구되는 것이며 다친 상처를 도려내는 아픔을 감수해야 더 이상 번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더 큰 상처를 낼지 모른다는, 보복이나 단죄의 관점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상처의 치유, 세상의아픔에 전혀 관심없음을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이웃과 사회에 대한 무관심이야말로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역행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교회의 홍보매체에 대하여 드리는 첨언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은 인간에 대하여 끊임없이 대화하시는 하느님, 참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담겨있는 대화와 참여는 현대의 고도화된 물질문명 속에서 그에 준하는 말씀(Logos) 의 전달체계, 홍보수단을 필요로 합니다.
그 과정에서는 매체의 조건에 따라 말이건 글이건 아무런 제약없는 표현을 다양하게 해낼수 있어야하고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말이나 글의 궁극적인 목적과 그것의 원인과 결과가 인간을 위한 사회의 공동선을 추구하냐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지 그냥 보기 좋고 듣기 좋은 것으로 채워지는것은 본래의 역할과 기능을 포기하라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가톨릭신문」역시 그 역할과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지난 60여년간 봉사하여 왔고 시대적 상황과 조건하에서 충분하진 못하나 일정한 기여를 해왔다고 생각됩니다. 귀하의 글을 읽고 새삼 들추어 본 가톨릭신문의 정치관련기사나 표현들은 자기 역할을 다하기 위한 의지에서 비롯된 작은 몸짓이며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격려 받아야할 고무적인 현상입니다. 교회의 홍보매체들은 그러한 의지를 통해『새로운 인간관계를 촉진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관심을 기울이며, 정의와 평화를 도모하고 서로 협력하며 사랑과 일치를 이루게』(일치와 발전12항)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저의 글이 귀하를 비롯한 우리 모두의 신앙생활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는 결과를 가져오길 소망하며 늘 평안하시고 주님의 은총속에 기쁜 나날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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