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곡의 현재 온도는 32도입니다』기내 방송을 듣고 5시간 30분간의 비행을 마무리하면서 내릴 채비를 했다.
1월 8일 서울 새마을운동 본부에서 거행된, KAL 858기 탑승희생자 1백 15명 합동 위령제를 마치자마자 출발한 방콕행 비행은 줄곧 침통하고 무거운 것이었다.
지난해 11월 29일 KAL 858기가 버마영해 안다만의 상공에서 북한공작원들로 인해 공중폭발, 탑승자 전원이 희생당한 충격적 사건은 유가족은 물론 국민 모두의 가슴에 진한 아픔을 주었다. 탑승자 대부분은 중동의 뜨거운 사막에서 온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일하다가 귀국하던 근로자들이었다. 외화를 벌어들이고 국위를 선양하던 믿음직한 장한 일꾼들이었다.
조금만 더 참고 견디자, 조금만 더 고생해서 귀국 후 함께 잘 살아보자고 떨어진 가족들을 달래가면서 악조건의 기후와 싸우고 풍토병과 싸워가며 온 힘을 다해 일하던 그이들은 이제 몇시간 후면 그리던 조국 땅에 보고 싶은 가족들 품에 안길 것을 생각하면서 그 동안의 노고도 다 잊은 채 어서 김포공항에 도착하기만을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또는 KAL기의 유능한 승무원으로서, 동네길 다니듯 익숙하게 하늘을 비행하던 이들이 그날도 근무를 마치는 대로 집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편히 쉴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그들이 삽시간에 참변을 당한 것이다. 그 원혼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우리는 비행기가 추락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가는 것이었다.
태국 방콕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아침 안다만 상공을 향하였다. 2백 30석의 비행기 내부 좌석 중 앞줄 30개 정도의 의자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만들어진 진혼제상은 검고 흰 천으로 드리워져 있었으며, 수없이 많은 국화꽃으로 꾸며지고 각종 과일과 촛불 그리고 「대한항공 858편 탑승 희생자 신위」라고 적힌 위패가 놓여 있었다. 김좌수 태국대사와 참사관이 동승한 가운데 출발 직후부터 울려 퍼지던 진혼곡을 들으며 추락 지점에 이르러 저공 비행을 하면서 진혼제를 시작하였다.
불교ㆍ개신교ㆍ천주교의 순서로 의식과 기도가 진행되는 동안 희고 검은 상복을 입은 남편을 잃은 미망인들, 자식을 잃은 부모들, 형제를 잃은 이들, 아버지를 잃은 자녀들은 계속 오열하고 있었다. 그 다음, 국화 한송이씩을 전단에 바칠 때는 몸을 가누지 못해 쓰러져 정신을 잃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진혼제가 시작되기 전부터 울먹이며 『여보, 여보, 내가 왔어요. 내가 여기 왔어요!』 를 몇 수십번이고 반복하는 50대 미망인의 한맺힌 부르짖음은 기내 모뜬 이들의 마음까지 찢는듯 아프게 했다. 창가에 서서 검푸른 바다를 내려다 보며 절규하는 또 한부인의 모습도 분위기를 한절 슬프게 하였다. 몰래 숨겨 들고간 영정을 제단에 모셔놓고 넙죽 큰 절을 하는 이들도 있었고 꽃송이를 바치고서는 울먹이며 자리를 뜰줄 몰라 직원들이 부축하여 제 자리로 모셔드리는 모습도 많이 보였다. 맨 마지막에 현대건설 김선호씨의 6세된 딸이 아빠에게 보내는 『아빠, 보고싶어요. 그러나 참고 있어요. 저는 아빠를 닮아서 예쁜 마음으로 살아갈 거예요…』 라는 편지가 낭송될 때는 다시금 조용한 가운데 슬픔을 되새기게 했다. 저공 비행을 하기 때문에 기상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다 유족들의 동요로 기체가 많이 흔들려서 불안감도 없지 않았지만 약 3시간의 비행을 무사히 마치고 다시 숙소에 돌아왔을 때는 모두가 허탈하고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다음날은 주일이었으므로 투숙한 호텔의 회합실에서 미사를 봉헌했는데 신자 사망자 9명의 유가족 17명이 참석하여 엄숙한 분위기를 이루었다.
3박 4일의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모든 이들은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 간절한 기도를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 세상에 죄악이 많다고 하지만 무엇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이 이토록 허무하게 죽임을 당해야 한단 말입니까? 주님, 우리는 이 비통한 사건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데올로기의 차이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이처럼 처참한 일이 왜 일어나야 하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전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기 힘든 동족상잔의 저 6ㆍ25사변을 비롯하여 그후 이어진 크고 작은 동족살륙, 그리고 수년 전의 아웅산 사건처럼 이번에도 동족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이었으니 우리 단일민족이 겪어야 하는 이 진한 아픔을 무엇으로 달래야 하는 것입니까? 또한 몇년 전 KAL 007기의 탑승객 2백 69명이 소련 전투기의 공격으로 무참하게 산화되었던 사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 민족이 언제까지나 이런 어처구니 없는 참살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제 그만 그치게 해주십시오. 이번 사건에서의 1백 15위 그 고귀한 생명을, 인류의 죄로 인해 당하는 마지막 속죄양으로 받아 주시어 다시는 무자비한 폭력에 의한 이같은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당신의 능력의 손으로 막아 주소서. 또한 그런 일을 저지른 자들이 자신들의 과오를 깊이 깨닫게 하여주소서. 회개하여 그들도 주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변화시켜 주소서. 그리하여 남북을 가로막는 가시철망이 사라지로 민족 대화합이 이뤄지게 해 주소서. 이민족처럼 갈려 나간 우리 민족이 가슴을 펴고 서로 얼싸안으면서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그날이 하루 속히 오도록 하여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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