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세를 받은 후 성찬의식에 참석할 때마다 아주 가깝게 마음에 와닿는 기도문 귀절이 있다. 가슴을 세번 치면서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 소이다』하고 되뇌이는 고해의 기도문 귀절이다. 기실 이만큼 인생을 살면서 스스로를 돌이켜 보면 조금쯤 잘된 일이나, 크게 잘못된 후회스러운 일들은 따지고 보면, 모두가 내 탓이요, 내 생각탓이요, 크나 큰 내 성격탓인 경우가 많았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 어린 혜준양이 유괴범에게 끔찍한 생죽음을 당한일이나 그애 부모 가슴에 쓰리도록 아픈 못이 박힌 것은 그들 탓이 아니니 어찌 하랴.
험악한 세상에 티없는 아기로 태어난게, 그리고 자식 키우는게 탓이더란 말인가. 그만큼 매스컴을 통해 나타나는 세태를 보고 있으면, 인간은 어디까지 악해지는 것일까 새삼 생각하게 된다.
서울과 과천을 사이로 맞붙어 있는 꽃재배단지가 지난해 태풍으로 똑같이 수해를 당했다. 한데 피해보상이 서울쪽은 기십만원에 쌀이 두가마인가 나왔다는데, 과천쪽은 기천원밖에 안나왔다고 주민들이 항의소동을 벌였다. 이에 대한 당국의 답변이 걸작 중의 걸작이다.
수해피해를 줄여보고한 탓이라니 천재지변 피해까지 거짓보고할 정도로 경직되고 비굴해져있는 공직사회더란 말인가.
인간은 어디까지 비굴해질 수 있는것일까? 세상을 떠들썩하게한 혜준양 유괴범이나 경찰과 더불어 공직자들의 어처구니없는 거짓보고 사건조작 등은 갖가지 인생문제에 대한 젊은 날의 철학문답같은 고민을 다시 떠올리게 할만큼 심각한 마음의 위기를 느끼게 한다.
유괴범일랑, 따스한 인간주의가 사라진 금전만능의 사회탓이요, 공직사회는 권력만능의 어느 기업인은 『투자에 있어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인간투자 밖에 없다』고 했는데 이는 결국 인간의 교육투자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나라의 세태가 이지경으로까지된 것은 인간교육이 제대로 안된 탓이라 하겠다.
어떻든 혜준양의 목숨을 끊은후 태연하게 돈을 요구했으며 돈을 찾아간 이틀후엔 결혼식까지 올렸다는 유괴범. 사체유기, 암매장, 자살극 등등, 저지른 일마다 악마같은 일을 한 그는 현장검증 이틀 전에 한 아기의 아버지가 되었단다. 어떤 말로 그를 비난하고, 무슨 말로 슬픔에 잠긴 혜준양 부모를 위로할지, 우리 모두가 TV앞에서 망연자실했을 뿐이었다.
「죄와 벌」의 작가 도스토에프스키는 『신과 악마가 싸우는 전쟁터는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는데 그 유괴범에게도 악마와 싸우는 마음의 전쟁터가 있었을까? 공직자들의 부정, 직권남용, 거짓보고 등등, 눈을 들리고 싶을 정도로 험악해진 불신뿐인 그들에게도 악마와 싸우는 마음의 전쟁터가 있었을까?
하긴 세상에는 사람들 눈에 뛸세라, 따뜻한 일들을 조용조용 펴면서 평생을 착하게 말없이 살아가는 삶들이, 악한이들보다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악한 일들이란, 그 자체가 큰 뉴스로 세상에 드러나 매스컴에서 떠벌리기 때문에, 더욱 소란스럽게 비추이는 것이라고 자위도 해본다. 그래도 근간에 일어나는 여러일들은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 언제인가 한 교통경찰이 뇌물로 받은 5천원의 비리를 승진보고에서 눈감아준다는 것을 빌미로 동료경찰관이 2천여만원인가를 뜯어냈다는 신문보도를 보면서 요지경 같은 공직사회윤리에 한숨조차 잃었던 생각이 난다. 법을 지키고 행사하는 경찰이나 법조계에서 만은(물론 언론도)빗나간 일이 없어야 나라가 튼튼하고 기강이 바로선다는데 근간엔 그것의 본고장이 만신창이가 되어 뿌리채 흔들리고있으니 어찌하랴. 구멍뚫린 공직사회의 불신과 치안부재를 틈타 흉악범들이 들끓고있어 국민들은 불안에 떨고있다.
경찰이 무능력해지고 공직사회가 불신을 당하고 기강이 흐트러질 때면 나는 다산선생의 목민심서 한귀절 한귀절이 그리도 소중하게 떠오른다. 그 중에서도 인상깊은 것은 공직자들의 일상적인 집무에 대해 쓴 수법대목이다. 법은 지키는데있어 『굽히지도 빼앗지도 말라』는 이 대목은 어찌 공직자들에게 뿐이랴. 우리 모두에게도 통용되어야 할 말이다.
법이란 나라의 명령이다.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나라의 명령을 받들지않는 셈이다. 그 나라 국민으로서 어찌 감히 그럴수 있을 것인가. 굳게 지키며 굽히지도 빼앗지도 말라. 문득 욕심이 움직이거든 물러앉아 하늘의 뜻에 귀를 기울이라. 대체로 국법이 금하는 것과 형법에 실린 것들은 조심조심 두려워하면서 감히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한다. 돈에 유혹되지도 말고 협박에 굴하지도 말라. 그것이 지켜내는 방법인 것이다. 비록 상사의 독촉이 있더라도 받아들이지않는 대목이 있어야 한다.
무슨 말을 더 붙이랴. 억울하게 생목숨이 끊긴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은, 끝내 아물지않고 해를 넘기면서 다시금 상처가 곪아터졌다. 기어이 경찰의 전고위간부가 구속되기까지에 이른 것을 보면 『비록 상사의 독촉이 있더라도 받아들이지 않는 대목이 있어야한다』고 타이른 다산선생의「수법」정신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살아움직이고 있다.
이제 어찌 할것인가? 이토록 나락에 떨어지 경찰의 위신과 신망과 부덕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 피나는 각고의 노력만 가지고도 안될것 같다. 옛날에 도군자(盜君子)들에게도 그들 나름으로 지키는 윤리가 있었다는데, 법을 지키며 국민의 안녕을 돌보는 경찰의 이 부끄러운 몰골을 어떻게 건져낼 것인지. 박봉속에서도 말없이 제임무를 다하고 국민들의 지팡이 노릇을하며 올바름에 애쓰는 많은 경찰관들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제자리를 찾아앉길 바란다. 이달부터 시작될 새대통령과 정부의 새로운 다짐과 민주화에의 책임수행이 공직사회 기강확립에 큰 열쇠가 됨을 명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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