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치도 못했던 상황 전개들이 매일처럼 우리를 놀라게 하고있다. 아리송한 결말로 꼬리를 감추었던 이른바 권양사건으로 불려온「부천서성고문사건」이 진실의 얼굴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 사법부의 용기, 검찰권의 확립 등등 여러가지 반응이 권양사건에 대한 사법부의 재정신청 결정을 뒤따르고 있다.
민주화로 가는 길목이 저만치 보이는 것 같기도하고 어쩌면 민주화라는 기차가 제궤도에 올라선 것 같기도 하다. 그동안 무제한의 공권력과 관권개입으로 공중분해된 무수한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우리는「어쩔수 없다」는 자괴감 속에 우리 자신을 묻어버리고만 것이 사실이다. 특이한 정치현실아래 반복되는 사건과 그 문제들은 이미 그 현실에 익숙해진 우리의 느낌을 상당히 이완시켰던 것도 사실이다.
축소되고, 은폐되고, 조작되었던 故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거짓이라는 탈을 벗기 위해 세상 앞에 드러났을 때 당시 본보 데스트 칼럼은 한번에 맞을 매를 왜 두번씩이나 맞고자 하는가 하고 물음을 던진바 있다.당시「이번에는 진짜」라던 사건전모가 최근 발가벗기운채 다시 국민 앞에 서야했고 결국 같은 문제로 관계부처는 3번의 매를 맞은 꼴이 됐다.
박군 사건에 이어 다시 거짓의 탈을 벗기위해 진통을 겪고있는 권양 사건에 모든 국민들의 시선이 모아지는 것은 인권박탈의 극치를 이루었던 이 두 사건의 참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자하는 민의(民意)의 발로일 것이다.
이 두 사건의 진상 추적과정에서 언론, 특히 신문매체의 역할을 좌시할 수가 없다. 그 역할이 6·29이후 특히 대통령 선거를 전후로 극대화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민주화의 상징이자 꽃이라 할수있는 언론의 활성화, 언론의 기능회복 움직임들은 보라빛 미래를 약속해 주는것 같아 기분이 좋다.
이같은 분위기에 편승했음인지 최근 본보의 독자란은 그 어느때보다 의식있는 독자들의 목소리가 다양한 모습으로 열기를 더해가고 있다. 얼마전까지 신앙적인 소재가 중심을 이루었던 독자들의 글들이「정치적인 색깔」로 소재선택의 폭을 넓히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날 정치적 혹은 사회적 혼돈의 그늘하에 손발을 묶어야했던 언론의 현실에서 볼 때, 역시 그 현실의 울타리를 크게 벗어날 수 없었던 교회신문의 입장에서 볼 때, 이같은 현상은 하나의 발전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모든 것이 민주화를 추구하는 이 마당에 교회라고 예외일 수 없다는 상식적인 논리에서 본다면 톤이 높아진, 아니 색깔이 분명한 독자들의 주장은 실로 당연하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교회구성원 사이에도 서로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이들의 입장은 서로 다른 의견들이 자유롭게 표출되도록 기회를 제공한 신문의 결단(?)을 지지하는 편에 속한다.
반면 전혀 다른 반응도 있다. 어쩌자고 교회신문이 교회가 추구해온 민주화 노력에 역행하는 독자들의 글로 혼선을 빚게 하느냐는 것이다.
줄이어 들어오는 독자들의 찬반 견해는 때론 준엄하고 때론 위협적이기까지 한 것이 참으로 난감할 때가 많다.
아직은 미흡하지만 오늘의 민주화와 정치발전의 흐름이 교회의 노력과 무관하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있다. 한국사회가 겪어야했던 일련의 사태속에서 교회는 짓밟힌 정의와 땅에 떨어진 인권, 가려진 진실을 되살리고 밝혀내기 위해 어려운 몫을 담당해냈다.
표현상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본보의 독자난을 장식하는 색깔질은 원고들도 민주화와 인권신장 등 교회의참여 자세에 지지와 격려로 뜻을 같이하고 있다. 이처럼 같은 론의 목소리가 다른 방향으로 갈라지는 것은 바로「특정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할수 있는가 없는가하는 참여 방법상의 문제」에서 시작되고 있다.
여기서 한번쯤 우리의 생각들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옳고 그르다는 주장에 앞서 이에 대한 교회당국의 유권적 해석이 아직 없다는 사실이 그중 하나다. 주교단 담화문 이후 진전된 여러가지 교회의 현상들에 대해 교회의 공식 목소리가 아직 없다는 얘기다. 권위있는 목소리의 유권적 해석이 없는 이 시점, 독자들(신자들)의 갑론을박은 그 내용은 차치하고「평가절하」될 수 밖에 없다.
독자들의 강도 높은 주장이 또 다른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문제에 대한 정답을 구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때문에 독자들의 토론은 아직 이른감이 든다. 공식적인 견해가 없다는 사실 외에 독자 토론이 아직 이르다는 느낌은 또다른 데서 찾아볼 수 있다. 페어플레이의 경험부족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경직된 정치, 사회분위기 속에서 자유로운 의사표시 방법을 키우지 못해왔다. 더구나 우리에게 남의 의사를 존중하는 토대 위에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는 여유가 일반적으로 없는 편이다. 토론이 곧잘 논쟁으로 돌변하는 것도 바로 이때문이다.
언젠가 본보 지면에서 펼쳐진 토론 아닌 논쟁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미 감정의 개입이 예견됐던 그 토론의 본보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면에서 맞부딪쳤고 한치의 양보없는 목소리 교환이 반복되기에 이르렀다. 우리의 우려와 예견은 불행하게도 정확했으며 불꽃이 튀었던 그 논쟁의 후유증은 억지로 자리를 내주어야했던 신문에게 집중됐다.『왜 쓸데없이 그런 자리를 마련했느냐』고.
자기의 주장을 효율적으로 펴내는 것은 상대방의 주장을 먼저 수용할때 가능한 일인것 같다. 절제되지 않은 표현들은 날카로움은 있으나 수용보다는 거부쪽으로 보다 많은 반응이 되돌아 오기 마련이다.
감정을 이성으로 다스리고 한번 더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독자들을 위한 토론의 장을 열것이다. 이같은 준비의 토대 위에서라면 가톨릭 신문은 독자들이 엮는 광장을 통해 보다 건강한 모습으로 살을 찌울수 있을 것이고 그 토론의 장은 결코 이르다는 지적을 받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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