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지상생활은 죽음으로 끝난다. 죽음은 우리에게서 지상의 모든 것을 앗아간다. 인간은 죽으면 저승의 깊은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죽음은 최고의 고통이요 공포이며 절망감을 준다.
신앙을 갖지않은 사람은 더욱 강하게 느끼지만 그렇게 그리스도안에 신앙과 소망을 가진 사람은 그러한 것을 약하게 느낀다.
하긴 그리스도께서도 고난과 죽음의 잔(공포)를 거두어 주시기를 아버지께 기원하셨다(마태 26, 39). 그러나 고난도 죽음도 성부의 뜻이기에 피하려하지 않으셨다.
『아버지 이것이 제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질 수 없는 잔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26, 42). 예수께서 분명히 죽음을 원하지 않으셨으나 아버지의 뜻이라서 피하시지 않으셨다. 그것은 아버지께 대한 신뢰에서 나온 결단이며 순종이다.
그리스도의 길은 사랑의 길이요 순종의 길이며 섬김의 길이요 양들의 행복을 위해 끝까지 가는 봉사의 길이며 수난의 길이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면 버림받지 않으리라는 신뢰심은 자신을 온전히 포기할 수 있었다. 목숨을 잃어도 다시 얻으리라는 확신은 부활을 향한 신뢰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피하려 했다면 아무리 반그리스도의 무리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을지라도 능히 피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다. 여기에서 예수의 그리스도다운 풍모와 사명감 의식을 뵐 수 있다.
죽음을 피하려 했다면 죽음을 거역하고 대항하며 방어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타협하거나 목숨을 애걸하거나 꽁무니를 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으셨다. 비폭력 무저항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과도 같이 묵묵히 수난의 길을 끝까지 가셨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길이요 생명의 길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있는가. 머리로는 따르면서 마음으로는 양갈래 길이요 행동으로는 주저하며 안일한 길을 택하기가 일쑤다.
입으로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하고 반복하며 기도하면서도 자기가 손해본 듯 할때나 바보취급 받을라치면 십자가의 바보가 되는 길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리고 세상의 지혜를 따르는 약삭빠른 무리가 아닌가.
그리스도께서는 목숨을 버림으로써 얻는 길을 가르쳐주셨고 남을 섬김으로써 섬김을 받는길을 가르쳐주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누구에게 버림받고 고난을 당하셨는가. 당시 높은자리에 있는 이들로부터 버림받으셨다. 대제관, 고위층인사들, 군인들, 존경받는 지식인, 율사들, 유지들, 친척들과 고향사람들, 제자들과 몰식의 무리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셨다.
지금도 이 무리에 속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다. 아니 박해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신분과 명예에 조금만 위기감이 닥쳐와도, 자기의 운명과 전도에 장미빛 꿈이 아닌 어두운 그림자만 비쳐도 그리스도를 쉽게 팽개치는 무리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마르 8, 34~35)라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고 증거한다는 무리들이 자신의 세속적 명예와 영광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버리고 자기십자가도 내팽개치는 것을 세상은 보고 있다.
자신의 신분과 명리를 위해서는 아랫사람도 버리고 양떼도 버리는 예수 없는 십자가, 십자가 없는 영광을 쫒는 것을 세상은 비웃는다. 아니 예수없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힘 없는 백성은 슬피울고 있다.
예수께서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지도자들 때문에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때문에 위선의 탈을 쓴 화려한 옷 입은자들 때문에 애국을 가장한 높은 벼슬아치들때문에 부국과 풍요한 사회를 가장한 정경모리배들 때문에 그리스도는 오늘도 봉사의 희생을 당하신다. 사랑의 희생을 당하고 계신다.
어줍잖은 애국자들과 점잖은 분들이 가난한 인권사회운동가들과 노동자 농민의 제 몫을 달라는 목소리를 글러먹었다고 호되게 비판하고 추상같은 명령과 질책을 한다.
자신들은 고난받는 양을 위하여 억압받는 민중을 위하여 감옥에 간 시대적 예언자들을 위하여 손가락하나 까딱 안하면서 누구를 위하여 점잖을 빼는가. 누구에게 곱게 보이려고 아첨하고 아양을 떤단 말인가.
소외당하는 보잘것 없는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기에 당신들이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먼저 부인했으므로 그리스도께서도 훗날 당신들을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으실까 걱정이 되는구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유식하고 권위있게 뭐라고 말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연민의 정을 베푼 소외당한 사람들이 없는 당신들의 하느님의 나라, 잘사는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자신의 지위와 체면을 손상할까봐 책임을 회피하려 손을 씻는 어쩌면 빌라도를 닮은 것 같구려.
무주택자들을 거리로 내몰고 가진 자들이 하느님의 땅이요 나라의 땅이며 백성의 땅을 돈의 위력으로 가위질해서 한치 땅도 없는 서민들은 설곳이 없는 세상이 당신들이 말한 잘사는 나라인가.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고 진리를 말하며 정의를 외치고 기적을 행하신『예수가 미쳤다』(마르 3, 20)고 한 무리들과 당신들은 초록은 동색이란 말이 어울릴 것이외다.
까딱 잘못하면 당신들도 예수와 같이 정신나간 돌아이라고 비판받고 몰락당할 것이 두려워서 권력자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택한 지조와 신념이 없는 처세가로 둔갑해버린 변절자인가? 아니면 자기네들의 지위와 부영과 기득권을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사이비애국자. 사이비종교인으로 전락했단 말인가?
한국의 성인들은 십자가 위에 죽으신 주 그리스도 때문에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 위대한 순교자들이시다.
순교의 얼을 본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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