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중에 상대의 신당에 대해서 질문을 할 때가 있다. 그때 상대가 『예 기독교입니다』라고 대답하면 백에 아흔아홉은 개신교 신자다. 또한 우리는 어느 사이에 개신교에게 이름을 양보하고 「천주교」라고 대답한다. 내가 알기는 그리스도교를 한문으로 표기할 때 「기독교」가 되며 동일한 뜻이기에 진정한 의미에서는 우리가 기독교인데 어쩌다 우리는 천주교가 되고 루터교, 또는 다른 표현을 써야할 저희가 기독교라고 하고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그뿐인가 지난 1월 24일자 가톨릭 신문 7면 「한국의 신흥종교」란을 보면 정말 한심하고 부끄러워진다.
10년동안 한번도 빠지지 않고 매일 미사에 참례하던 교우가 「여호와의 증인」신자가 되어 자기 대녀(代女)약 1백명을 「여호와의 증인」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분주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며 이「여호와의 증인」신자 가운데 70~80%는 가톨릭에서 개종한 자들이라고 자랑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자랑하고 있는 신흥종교의 기원은 멀리 1517년 10월 31일 「비텐 베르그」 성당문에 반항문을 써 붙인 「마틴 루터」라고 볼 수 있으며 이때 이후부터는 각자의 생각에 따라 수시로 종파가 생겨났다. 1936년 미국정부 종교조사서는 루터파만 해도 20파가 넘고 감리교 17파 장로교 10파 침례교 21파 등 굵직한 종파외에 소소한 파까지 열거하면 3백파 이상이나 된다고 한다.
이속에 포함될지도 알 수 없는 신흥종교인 「여호와의 증인」이지만 우리에게 느끼게하는 바가 크다. 구태여 성경의 자의적(字意的)인 해석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신문글의 끝부분에 보면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이 이들과의 접촉을 두려워하는 것은 「성서와 교리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단정하고 있는 점이다. 이 말은 이름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성서까지도 점잖게 양보해 버렸다는 뜻이 아닌가. 조금이라도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다면 이처럼 낭패한 기분은 아닐 것이다.
양보할 것을 양보해야지 이건 도무지 말이 안된다. 증권투자에도 이와 같은 경우가 허다히 있다. 오랫동안 가격이 움직이지 않는 주식을 마음고생을 하며 보유하고 있다가 조금 상승하면 그냥 몸살이 나서 팔아버린다. 그러나 그것을 매입하는 사랑은 많은 노력과 과감한 판단과 손실의 위험을 감안하면서 매입하기에 정확한 판단이었다면 더 큰 이익을 보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2천년 동안 보유해온 성서도 읽는 노력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2천년 동안 지켜온 신앙」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 「순교자의 후예」 다 좋은 이야기다. 그러나 「성경에 맛」들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알지 못한다면 10년동안 하루도 빠짐없는 미사참례로 1백명의 대녀를 덤으로 주고마는 그야말로 「죽쑤어 개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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