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의 현자들은 역사를 통해서 자신과 나라의 나아갈 길을 찾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역사를 올바로 읽을줄 아는 민족만이 영광의 장래가 보장되어왔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나라 역사 중에서도 이조 5백년은 나 자신과 우리 민족에게 너무나 가치가 없는 것을 남겨준 기간이었다고 생각하고 있기때문에, 이를 소재로한 사극을 지극히 싫어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배울것 없는 선조들의 걸어간 발자취이기는 하지만 있는 그대로 정의의 입장에서 기록한 시의 사관들에게나마 머리 숙여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다. 지난 여름 학회일로 동료 한분과 같이 결남북일대의 각 병원 실태 파악을 위해서 여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부산의 모호델에 같이 투숙하고 저녁식사를 나눈후 모처럼 부산에 왔으니 바닷가에나가 신선한 회에 소주나 한잔하자고 제의하였다. 평상시에는 거절하지않을 그 동료가 사양하면서 오늘 저녁은 꼭 텔레비전 연속극을 봐야겠다고 고집하였다. 도대체 꼭 봐야 할 연속극이 무엇이냐고 했더니 당시
방영되고있던 하대 드라마 사극이었다. 나도 하는수 없이 그 사극 드라마를 같이 시청하게 되었다. 그 동료는 그 극중의 한명회외 정치변신에 온통 사로잡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대하드라마 사극 등은 우리나라 중견작가들이 극본을 쓸 역사드라마일 뿐 역사 그자체를 충실히 기록한 극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과거 우리가 배웠고 알고있는 정사(正史)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내용들이어서 정사를 잘 모르는 시청자틀에게는 드라마에 묘사된 것틀이 사실처럼 인식될수 있을 것이고. 역사를 전공하지않는 우리 같은사람들에게는 가치혼동의 착난에 빠질 수있는 내용들이었다.
그중에서 세조는 인자하고 사려 깊으며, 역사의식이 투철하고 인간미가 넘쳐흐르는 성군으로, 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 중에 한명회 같은 간신은 역사에 대한 통찰력과 시대감각이 투철한 에리트 정치인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또 드라마의 도처에서 정치는 힘에 의해서 움직이며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편에서 기술된다는 역사관을 갖게 하는 내용들이였다. 그러나 역사를 한시대의 단편만을 놓고 본다면 그러한 논리 및 해석이나 철학이 통할수 있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않는다는 「마키아벨리」 적인 힘의 철학이 통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정의의 사관들의
기록을 통해서보면 일시적으로 불의가 득세하고. 기회주의자가 부귀영화를 누릴수는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결코 오래갈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있다. 곧 숨겨린 진실을 후대에 적나라하게 표출되어 정의가 승리함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사에 의하면 문종이 승하하고 12세의 단종이 즉위하자, 그의 숙부 수양대군이 정변을 일으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것은 단종 1년 10월이였다. 그는 영의정으로 사실상 임금이었고 어린 단종은 있으나마나한 존재었다. 수양대군을 따르는 사람중에서 대표적 인물로서 한명회·신숙주 등을 들수 있는데, 우리가 배운 역사속에서는 적어도 이인물의 하나는 간신으로, 하나는 변절자로서 우리의 뇌리에 박혀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식들을 이러한 인물로서 키워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근래 신문지상이나 드라마를 통해서 이러한 인물들이 시대감각이 예민하고 훌륭한 정치보필자로 평가하는 내용들이 나타나고 있으니 우리들의 판단에 착난을 일으키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특히 사육신중의 성상문은 신숙주와는 대조되는 인물로서 옛날 세종대왕시절 집첨전에서 부좌하신 대왕외 말봄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왕조의 정틀성율지키기 위하여 플까지 노러한 대표피 인품이라 營수 있을것이다. 딘종 3년 6월에 합택에 이기지 못한 단종은 경회투에서 수양대군에게 옥채볼 전하게되고 고후 성상문들은 란좋복위운등을 하다가 배반자의 밀고로 세조의 모진고문을 말게친다. 뚜서운 고물속에서도 나라의 정통성과 성왕 세종매장에게 출성을다하면서 동료 신숙주에게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고 한다. 『옛날 집현전에 입적했을때 대왕께서 손주를 안고 이아이를 내가 죽은후에도 잘 보살펴 달라시던 간곡한 말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한데 너는 그것을 잊었단 말이냐. 네가 그렇게 간악한 줄은 미처몰랐다』 고 나무랐을때 신숙주는 입장이 곤란하여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지금도 민간에서는 신숙주의 변절을 나쁘게 본 나머지 잘변하는 녹두나물을 「숙주나물」 이라고 일컬어 오고있는 설정이다. 그후 신숙주는 동료 성삼문이 의와 충성을 다하고 죽은뒤 14년동안 부귀영화를 더 누리고 병사했지만 그는 역사 앞에 오명을 남겼을 뿐이다. 10년을 더살고 못사는 것은 긴역사의 안목으로 볼때 참으로 하찮은 기간에 불과한 것이다. 누가 뭐라한들 세조의 불의에 대항하여 싸우다 비명에 간 사육신들의 정의감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온 것이 사실이고, 오늘의 탁류속에서도 야심을 팔지않고 옳게 살려고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 숨은 지성인들의 몸부림을 우리는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근래 각종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역사상 당대의 사태를 어쩔수없는 시대흐름, 대세의 추이등의 용어를 쓰면서 어쩔수 없는 시대적 요청으로써 역사적 당위성을 왜곡시키고 있는 사실들을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역사를 바로 인식하고 있는 양식있는 독자나 시청자들에게는 참으로 역겨움만 주고 있는것이다.
오늘날 말의 홍수 속에서 너무나 말과 행동에 표리가 다름을 주위에서 보면서 우리 자신의 삶의 가치판단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 것인가. 하루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깊이 반성해 보지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성삼문의 46년간의 청빈과 충절의 삶과,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주보이신 김대건 신부님의 26년간의 짧은 생애를 생각해 보면서 오늘의 흔탁한 매스컴 속에서 각자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겠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수고해주신 박현서씨·강희근교수·김신호신부·김양진씨께 감사드립니다.이번호부터는 안득수(전북의 대교구)·손숙(연극인)·이종한신부(프란치스꼬회한국관구장)·구병진신부(대구가톨릭대교수)순으로 집필해 주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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