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다스리는 최고의 통치자가 이례적으로 사회범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마치 미약사범에 대한 부시 미국 대통령의 선전포고를 방불케 하고있다.
몇년사이 우리사회는 범죄의 천국인 듯 하다. 무정부 상태처럼 온갖 범죄들이 난무하고 그것도 사람으로서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인륜을 저버린 것들도 예사로 저질러지고있다. 요사이는 편안한 마음으로 길을 걷거나 집에 있을 수도 없다. 언제나 긴장해야 한다. 더구나 부녀자들의 불안과 공포는 노이로제 증상까지 보이고 있다. 그뿐이랴, 딸 가진 부모들의 안절부절하는 심정이나 어린아이를 가진 부모들의 불안은 극에 달하고 있다. 세계 범죄 올림픽이 있다면 우리사회는 가히 금메달감이다. 사회를 지탱해주는 도덕이나 윤리의 기둥이 무너지고 있다.
이러한 우리사회의 현상과 종교와는, 구체적으로 교회와는 무관한 것인가? 우리나라만큼 종교적인 나라는 드물 것이다. 주일마다 성당이나 예배당은 언제나 신자들로 가득하고 절간마다 불자들이 넘치고 있다. 종교의 집회는 수십만 혹은 백만이상의 사람들이 몰려든다. 전국 방방곡곡에 어딜가나 십자가를 높이 올린 성당이나 예배당을 볼 수가 있다. 불교도 이제는 산에서 내려와 도심지 복판에 포교의 집을 마련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정부가 발표한 통계로는 전국민의 3/4이상이 종교를 갖고있다. 더구나 각종교의 교파들의 발표한 자기들의 신도수는 합계가 우리나라 인구를 훨씬 능가하고있다. 종교 인구에 있어서도 세계의 금메달 감이다.
범죄의 금메달, 종교인의 금메달 이 두개의 상반되는 것들이 우리사회에서 극성을 부리고 있다. 범죄와 종교는 전혀 다른 측면이겠지만 어떻게 보면 상당히 관계가 밀접한 것 같기도 하다. 세상에 의인들만 있다면 예수님도 부처님도 오시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어느 성인은『오, 복된 죄여』라고 읊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오신 것은 죄를 권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의 굴레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끝내는 구원으로 인도할 목적이 아니던가. 그것은 죄의 결과가 인간의 불행을 가져왔고 그래서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깨우쳤던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뉘우치고 다시는 그러한 죄에 물들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있다고 본다.
교리적으로 볼 때 교회가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에는 그만큼 범조가 줄어들어야한다. 교회의 신자가 많으면 많아질수록 그 사회는 그만큼 더 깨끗해지고 맑아져야 한다. 그래야 교회의 역할이 세상에 그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그와 정반대의 현상으로 가고 있다. 교회가 많아질수록, 신자들이 더 많아져도, 범죄는 더욱 많아지고 세상은 더욱 험악해지고 개선되는 커녕 이제까지 지니고 왔던 도덕성마저 없어지고 있다. 성직자나 수도자들의 수가 많아지고 있는데 사회는 더 어두워지고 방황하고 있다. 왜 그러한 모순적 현상이 일어나는가? 무엇 때문인가?
모르긴 하되 그 원인을 우리의 정치나 교육에서 찾아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혹자는 범죄의 증가를 사회의 필연적인 추세나 현상으로 해석할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인간의 욕구가 증대하였고 그 욕구는 퇴폐적이고 향락적으로 흐르고 그러한 욕구의 충족을 위해 범죄는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마 그러한 주장들이나 생각들이 옳은것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사회가 겪고 있는 이 끔찍스런 범죄의 현상이, 그래서 불안한 이 사회현상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것인가? 이대로 방치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종교는 무엇이며, 교회는 왜 있는가?
사회의 범죄를 없애기 위해서 국가의 권력으로만 될 수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 제아무리 경찰의 숫자를 늘려도 범죄는 줄어들지 않는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사회의 도덕성이다. 그것은 우리의 윤리적 문제인 것이다. 이 근본적인 문제에 종교가, 구체적으로 우리의 교회가 제 구실을 해야하는 것이다. 종교는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그 사회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세계에 기여를 해야한다. 아마 그러한 기여가 종교의 본질상 어울리는 역할인 것이다.
지금까지 교회는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부수적으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활동을 열심히 해왔다. 그리고 육신의 고통에 처한 많은 병자들을 위해 엄청난 의료사업도 해왔고 지금도 어느 종파나 단체보다 앞서있다고 본다. 그래서 자랑스럽다. 가난하고 병든자들을 위한 구제활동도 교회의 중요한 역할이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정신적 삶에 영향을 줘야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적으로 혹은 윤리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자극을 줘야하는 것이다. 더 바라기는 우리사회에 그리스도적 원리를 생활케하여 정신적 황폐와 현상을 극복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교회는 우리사회의 도덕적 상황을 발전시키는데 별 기여를 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정치적인 집단에 편승하여 고발하고 과격한 전위대 역할을 해왔다. 정치적 활동이 마치 교회의 정의 실현인양 외쳐됐고 지금도 그러한 활동을 보고있다. 그것은 시류에 편승하는 느낌을 주고 있으며 영원한 구원의 역사를 지닌 교회의 얼굴에 걸맞지 않는 몸짓들인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정치의 세계에서도 도덕성이 요구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 구서구석 모든 면에서 요구되는 보편적 요청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느특정 분야나 집단의 도덕성 뿐만아니라 사회전체의 도덕성에 관심과 영향을 가져야 한다.
지금 평신도 협회에서 벌이고 있는「내 탓이오」의 운동도 바로 교회의대사회의 역할 중에 하나라고 보아서 그 운동에 기대가 안팎으로 많은 것 같다.
「내 탓인오」는 어떻게 보면 소극적이며 비합리적인 주장이다. 그것은 낭만적이고 순진한 생각이다. 세상의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고 철없는 운동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그러나「내 탓이오」는『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대주라』는 그리스도의 당부의 말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그것은 가장 적극적인 도덕성의 행위이다.
오늘의 우리사회의 이러한 현상 앞에 먼저 교회가 「내탓이오」라 해야하고 그것은 바로 나의 고백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내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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