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전(前)대통령을 의장으로 하는 「국가원로자문회의」라고 하는 기구가 새로 생기게 된 것 같은데 이게 너무도 국민의 기대와는 동떨어진 것이어서 여론의 호된 질책을 받고 있다.
그리하여 비록 그 회의의 사무처 직원 몇명의 등급이 낮아지고 직원 숫자가 다소 줄어들긴 하였지만 그래도 시대역행적 발상이고 특정인을 위한 위인설관(爲人說官)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얘기다. 그런데 이 의장이 미국을 방문하는데 수행원이 몇 십명씩이나 따라간다고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것 역시 여론이 좋지 않았던 듯, 수행원 숫자도 슬그머니 줄어들었다고 보도되었다.
얼마전까지 위세 당당하던 그 전직 대통령의 체면을 유지하려는 생각에서 나온 조치들이 아니었겠는가…
6·25 전쟁을 겪고 난 후 제대로 배불리 먹지 못하던 50년대에 많은 구호물자들이 교회기관을 통해 우리한테 나누어졌다.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 구제품들을 하나라도 더 얻어 타려고 안간힘을 다 썼고 그 바람에 성당은 항상 초만원이었다. 그리하여 이른바 「밀가루 신자」「구제품 신자」가 생겨났다. 그 당시의 어느 추운겨울 아침 미사에 할아버지 한분이 이상 야릇한 귀마개(?)를 쓰고 나왔다.
그때만 해도 지금과는 달리 제 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이어서 지금처럼 사제가 교우들을 바라보고 미사를 바치질 않고 벽을 향하여 미사지내던 시절이었다. 사제는 미사중 서너번정도 신자들을 향하여 돌아서서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를 라틴말로 하던 그런때였다. 마침 이 사제가 신자들을 향하여 돌아서서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하는데 이상야릇한 「귀마개」가 이 사제의 눈에 띄었다. 다시 벽을 향해 되돌아서서 미사를 분심 중에 바치고 또 신자들을 향해 돌아서면 그 이상야릇한 「귀마개」가 눈에 띄고하여 크게 분심하며 미사를 마친 본당 신부가 즉시 할아버지께로 가서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가하고 호기심을 만족시켜봤더니, 그건 귀마개가 아니라 바로 여자가슴용 「브래지어」였었다. 헐벗던 시절에 배급받아온 구제품중에서 브래지어를 발견한 그 할아버지가 도대체 이것이 무엇에 쓰이는 것인지 알덕이 없었다. (아니 어느 식구도 그것의 용도를 몰랐었다)그리하여 이할아버지의 브래지어 연구가 시작되어 결국 추운 겨울 귀를 보호하는 귀마개로 용도변경시키는 재치를 발휘하게된 것이었다.
그런 구제품이 우리에게 도움이되었던 그런 시절의 얘기다. 어느 시골본당에 마흔살정도 먹은 「말구」라고하는 냉담교우 한분이 있었는데, 이 분 역시 이른바 「구제품신자」중에는 구제품이 끊어진 후에도 신앙의 의미를 깨달아서 열심히 신앙생활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에는 구제품이 떨어지자 성당과 담쌓은 그런 사람들이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 말구씨 또한 성당에서는 전혀 얼굴을 볼수없는 전형적인 「구제품 신자」였다. 하루는 본당신부가 본당수녀와 함께 사순절을맞아 여러교우가정들을 방문하다가 이말구씨 집을 찾았다. 본당신부가 이렇게 말을 꺼내면서 대화를 시도하였다. 어디 몸이 불편하시느냐, 무척 바쁘신 모양이시라느니, 왜 가끔 성당에 나오시지 않느냐 등등을 물었겠다. 그랬더니 말구씨가 귀찮다는듯이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신부님요 아이구 인자 나한테 그만 관심 가지이소. 더 이상 날 찾아오지마이소. 아 그 구제품들은 참 고맙게 잘받아 썼심더. 그러나 그 댓가로 한 1년 열심히 성당에 댕겨주었으면됐지 더 이상 우짜란 말입니꺼? 그정도 구제품받고 1년 열심히 나가줬으면 나도 할만큼 한거아입니꺼?그러니 인자 제발 날 더 이상 괴롭히지말고 찾아오지 마이소!』
이 얘기는 선배신부님들한테서 들은 참으로 웃지못할 우스운 에피소드이지만 실은 오늘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많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문제인 것이다.
나 또한 본당신부로서 이와 비슷한 경험들을 많이하였다. 1년에 한두번정도 성당에 나오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교우이지만 사순절이나 대림절 때 교우방문의 일환으로 그 교우집을 방문하여 잠시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고 난 그다음 주일에는 틀림없이 그 교우들도 주일미사에 나왔음을 확인하였으며 아울러 그 후로 또 다시 옛날처럼 오래동안 성당에서는 만날 수가 없는 그런 경험들을 많이 하였다. 열심한 교우들도 헌금바구니를 본당 신부가 들고 서있는 경우에는 좀 더 많이 내고 본당 간부들이 들고 서있을때는 좀덜내고 헌금바구니가 놓여있는 경우에는 더욱 덜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느 신학책에 서양의 윤리가 「양심의 윤리」요 「죄와 탓의 윤리」인데 반해서 극동(중국·일본·한국)의 윤리는 「체면의 윤리」요 「수치의 윤리」라고 설명된 것을 보고 옳다고 느꼈다. 우리는 양심이나 신념, 소신보다는 나 자신과 내가 속하여있는 가정과 가문, 출신학교나 출신고장의 체면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그런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비록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긴했어도 「하느님 앞에 서있음」을 의식학하거나 하느님께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수치심을 더의식하고 체면과 위신을 더중시하여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성당을 찾고 있다. 이번 부활절에도 전국에서 수 만명의 새신자들이 생기게 될 것이다. 성당에는 다니지만 체면 때문에 다니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비록 사랑하는 아내의 권유 때문에, 세들어 사는 주인집 아주머니의 친절에 마지 못해서, 사단장의 권고를 거절하지 못하는 참모이기 때문에 성당문을 두드렸어도 서서히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행위를 하는 그런 신앙인의 되기를 바란다. 우리 극동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체면을 중시하는 이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오는 신념과 확신과 소신으로 사는 법을 어떻게, 어디서, 언제 터득하느냐하는 것이 복음화의 가장 큰 과제 중의 하나인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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