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도 이제 마지막 잎새만 남긴다. 학교마당에 낙엽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청소하는 아저씨들이 쓸어도 쓸어도 매 한가지이다. 낙하하는 생명체들. 그래서 낙엽 밟기가 꺼림칙하다.
「시몬, 너는 낙엽 밟는 소리가…」라는 서정적 시도 있지만 낙엽을 밟는 것은 어쩐지 비정한 느낌이 든다.
철 따라 자연은 변화한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자연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떨어지는 나무잎과 우리 사람들의 죽음과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영혼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만 접어둔다면 흙이 되는 것은 똑같은 이치가 아닌가.
교회력은 이달이 일년 중 마지막 달이고 또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달이기도 하다.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정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의 계절과 썩 잘 어울리는 발상이다. 죽음과 마지막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고 교회는 살아 있는 우리에게 어떤 시사를 던지고 있다.
근자에 나는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자주 듣게 된다. 이제 오십도 덜된 나이인데도 이처럼 주변 사람들의 비보를 자주 접하게 되는데 앞으로 얼마나 그런 서운한 소식을 들어야 하는지 서글프다. 작년 이맘때 미국에서 살던 절친한 친구의 돌연한 죽음은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근 한달동안 제대로 잠잘 수가 없었다. 흑인들의 총에 외롭게 죽어갔을 그를 생각하고, 유학가서 흑인의 총구 앞에 무릎을 꿇고 생과 사의 그 절망적 갈림길에 있었던 십여년 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죽음은 도둑처럼 온다는 성경구절을 실감했다고나 할까.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당신 차례(Hodie mihi, crastibi) 』라는 글귀가 대구대교구 성직자 묘소 정문 기둥에 걸려있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다. 마치 죽어 누워있는 송장이 살아있는 자에게 잔뜩 겁을 주는 말투가 아닌가. 『야! 살아있다고 너무 까불지 마라. 왕년에 너처럼 안 살아본 놈이 어디 있나, 너도 곧 나처럼 죽어 묻히게 될테니』
그렇다. 죽음이란 엄연한 사실인데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 외면하고 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죽음이란 내 삶과 먼 곳에 있고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 매일 살고 있다. 영영 죽지 않을 사람처럼 산다. 아니、죽지 않을 사람처럼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염두에 두고 매일매일 살아간다면 수도자들에게는 몰라도 우리같이 일상에 묻혀서 어지럽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고통이며 형벌일수도 있다. 아마 우울증에 걸려서 제명대로 살지 못할 것이다.
죽음이란 것을 아무리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해도 또 신앙의 눈으로 본다고 해도 유쾌하거나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건은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죽기가 싫다. 천당이 나를 기다린다고 해도 죽지 않고 이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비록 삶이 고달프다고해도 죽음에 비하면 그것은 엄살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 나의 신앙이 너무 약한 탓일 게다. 또 내가 영원한 삶을 볼 수 있기에도 너무 현세의 것에 매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현세의 것들을 털어 버려야 영원한 삶을 바라 볼 수 있는 눈이 생길 터인데 말이다. 그것은 나무가 긴 겨울을 이겨내서 생명의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아끼던 잎새들을 포기해야 하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그 아름답고 풍만한 사랑스런 잎새들을 하나씩 포기하는 지혜가 나무에게는 있다. 새봄을 위해서 지금(현세)을 포기한다.
신앙이란 결코 현세적인 것에 그 목적이 있지는 않다. 신앙은 현세를 극복하고 영원한 세계를 그 최종 목적지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은 은총이며 우리들의 희망이요 신념인 것이다. 그 영원한 세계를 위해 신앙인은 현세적 욕망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해방이란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포기하는 행위인 것이다. 마치 나무가 잎사귀들을 포기하듯 신앙인은 현세적 욕망을 하나씩 하나씩 털어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영원한 세계에 입문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공부하기 위해서는 노는 것을 포기해야 하듯 더 큰 것, 더 좋은 것을 위해서 우리는 그 아랫것들을 포기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수도자들과 성직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은 적어도 교회의 제도나 전통 안에서 그렇게 살아가도록 요구 받고있다. 그들의 겉모양도 그렇다. 까만 천으로 된 옷은 죽음의 색깔이다. 세속의 포기를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분들을 만날 때 마다 감격할 수밖에 없다. 세속의 욕망에 허덕이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러한 삶 자체가 큰 교훈이며 그저 존경스럽기만 하는 것이다.
잘 차린 음식을 대접 받기 좋아하고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선호하고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님을 당연시 여기는 성직자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또 무슨 축일 이거나 개인적인 축하행사에 너무 요란하게 떠들어 대는 것도 그 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아무리 극성스런 교유들의 부추김이 있었다 손치더라도 세속을 포기한 사람답게 모든 사치스런 유혹을 물리쳐 주기를 바라는 것은 나만의 희망사항인가. 그래야 나 같은 사람도 언젠가는 그렇게 포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얼마 전 교구장직을 미련없이 떠난 분이 계신다.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은 그러한 직책을 그렇게 쉽게 버리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나라 정치가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성직자라고해서 수도자라고 해서 다 자신의 자리를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분이 우리교회에 계셨기에 우리는 자랑스럽고 행복하다.
또 모든 세속적 욕망을 포기하고 지금도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남미의 빈민가에서 그리고 이 땅의 어려운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많은 수도자들과 성직자들도 있다. 그들을 우리는 사랑하고 존경한다.
십자가에 매달려 당신의 인간적 삶을 마감한 예수와『지금 죽으면 영원히 산다』고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를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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