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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되듯이 한반도의 분단은 제 2차 대전 이후 형성된 냉전체제, 다시 말해 전후 국제관계를 재편하는데 막강한 영향력을 구사했던 미ㆍ소의 이해 갈등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남한과 북한은 바로 이 냉전적 세계질서 속에서 6ㆍ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했으며, 이후에도 동ㆍ서양 진영의 어떠한 국가에도 견주기 어려운 적의적 대결 상황을 연출해 왔다.
국제정치질서가 1950ㆍ60년대의 냉전체제에서 1970년대의 데탕트체제로 전환되면서 남북관계도 잠시나마 대결에서 대화로 질적인 변화를 하는 듯 하였으나 끝내 심한 좌절만 남긴채 대화는 결렬되었다. 사정은 크게 다르지만 역시 분단 국가인 동ㆍ서독은 1970년대 초의 미ㆍ소 데탕트의 분위기 속에서「동ㆍ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새로운 공존의 기틀을 닦았다. 1980년대에 들어 미ㆍ중공 데탕트가 세계의 주목을 끌었으나 남북한 간의 통일과 평화를 위하여는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거듭된 대화의 결렬 속에서 남북한간의 불신은 오히려 깊어만 갔다. 이는 실로 오랫동안 적대적 관계를 유지해온 또 하나의 분단국 중공ㆍ대만이 80년대의 미ㆍ중공 데탕트의 기류 속에서 해빙을 맞고 있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런가하면 80년대에 형성된 미ㆍ소신냉전이 서서히 신데탕트로 옮겨가는 추세 속에서 최근 동독의 호네커가 서독을 방문, 양독(兩獨)간의 따뜻한 관계를 다시 한번 과시하였다.
이처럼 다른 분단국들은 국제정치 질서의 구조변화에 능동적으로, 또 슬기롭게 자신을 적응시키는데 비해 남북한은 아직도 냉전의 굴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채 끝없는 정신적ㆍ물질적 소모전을 계속하고 있다.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 한국의 국제환경, 특히 우리의 북방외교는 두 대상국인 소년과 중공이 급속히 변화되고 있고 동구에서도 새로운 봄이 움트고 있는 느낌이다. 그런가 하면 중ㆍ소 데탕트가 상당한 정도로 진전되고 있고 미ㆍ소 신데탕트의 물결 속에서 더욱 가속화 될 조짐이 뚜렷하다. 특히 최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유고슬라비아 방문을 마치면서 발표한「신베오그라드선언」은 각국 공산당의 독자노선을 첫명문화함으로써 공산주의 운동의 다극화 시대가 문을 열었다.
이들 소련ㆍ중공 및 동구 국가들은 한결같이 올가을 서울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참가를 약속했고, 이들 나라들과의 경제 및 사회문화 교류는 급속히 확대 심화되고 있다. 여기서는 이러한 국제환경, 특히 공산권의 변화양상과 그들간의 동태적 역학관계를 예의 검토하고 이어 평화와 통일의 맥락에서 우리가 이러한 변화에 보다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도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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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말부터 조심스럽게 개방정책을 확대해 온 중공은 날이 갈수록 과감한 자본주의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이제 남쪽의 심수(深{})로 부터 북쪽의 대련(大連)에 이르고 대륙동 남부 해안도시들은 대부분 경제특구와 경제개방부로 설정하고 외국자본을 기다리고 있다. 실용주의적 개혁정책은 이제 중공인민의 모든 생활영역에 깊숙이 파고들어 이들의 사과와 생활양식을 크게 바꾸고있다. 한ㆍ중공무역도 20억달러 수출에 이르렀다. 얼마전 전기운(田紀雲) 중공부수상도 한ㆍ중공 직접무역이 불원간 이루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직접무역이 시작되면 당연히 무역사무소가 필요하고, 무역사무소가 생기면 사람의 내왕이 활발해져 국교회복에 준하는 단계에 이르리라 전망된다.
그런가하면「고르바쵸프」집권 3년의 소련의 변화 또한 우리의 눈을 어지럽히기에 족하다. 1985년 4월 서기장 취임 한달 뒤에 열린 공산당중앙위 전체회의에서 그는 소련사회의 구조를 극본적으로 뒤바꿀 기본 강령으로「페레스트로이카」(재편성)와「글라스노스트」(개방)를 제시했다. 이 두 강령은 이듬해 2월 제 27차 공산당대회에서 공식채택되었으며 이후 각종 개혁조치의 이념적 틀로 기능해왔다.
이에 덧붙여「노보에 미슈레니예」(신발상)의 개념이 현재 소련에서 정치ㆍ사회ㆍ문화의 전 분야에 걸쳐 일고 있는 의식형명의 깊이를 일깨워 주고 있다. 「고르바쵸프」는 부패하고 경직화된 관료제를 크게 수술하고 당간부선출에 있어 복수 추천에 의한 비밀투표제 방식의 도입을 꾀하는가하면 무엇보다 경제부문에서 생산의 활력을 불어넣기위해 각종 인센티브제의 도입, 개인기업의 허용, 기업별 손익회계 방식의 채택등 광범한 자본주의적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소련은 이러한 국내개혁에 발맞춰 동구제국에 대한 기존의 통제고삐를 크게 늦추고 이들 나라에게도 폭넓은 개혁실험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
특히 세계정치의 차원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은 소련이 지난해 12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중거리 핵전략(INF) 폐기협정을 체결한 것이다. 한반도의 입장에서 볼 때, 작년 7월「고르바쵸프」서기장의「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태평양 국가선언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다.
이제 우리의 눈을 한반도 문제와 가장 밀접히 연관된 세 강대국인 미ㆍ소 및 중공 3자간의 상호관계로 돌려보자. 「고르바초프」체제의 출범 이후 소련과 중공간의 관계는 특히 경제 협력의 차원에서 날이 갈수록 접근하고 있다. 그간 중공이 소련의 데탕트제의에 비교적 신중한 태도를 견지한 것은 미국의 대소 강경노선 때문이었다. 미국과의 경제적 협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소련과의 일정한 거리유지가 불가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INF타결을 계기로 서서히 미ㆍ소 신데탕트가 무르익는 상황이므로 대소관계에 있어 중공의 운신(運身)의 폭은 훨씬 넓어졌다.
이렇게 볼 때, 앞으로 미ㆍ소 및 중공 3자간의 신데탕트가 형성될 조짐이 매우 농후해졌다. 이러한 강대국간의 화해 및 공존의 움직임은 세계질서 재편성의 가능성을 보이면서 한반도 정세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 예상된다.
70년대 미ㆍ소데탕트가 동ㆍ서독 평화공존의 단서를 제공했고, 80년대미ㆍ중공데탕트가대만ㆍ중공간의 해빙을 가져왔듯이 이제 앞으로 전개될 미 소ㆍ중공간의 신데탕트가 남북한간의 냉전적 대결상황을 불식하고 새로운 통일환경을 제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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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그동안 여러차례 북방정책을 공언해왔고, 또 거기서 남북한 관계의 개선을 모색해 왔다. 예컨대 남북한 동시 교차승인도 이러한 맥락에서의 발상이었다.
금년에 들어 한국은 중ㆍ소관계를 크게 개선했고 헝가리와 무역사무소를 교환개설하는 등 동구와의 관계도 하루가 다르게 가까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인식해야 될 것은 이들 공산권과의 관계가 아직경제교류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다. 88올림픽 등을 계기로 앞으로도 이들 나라와의 교류확대 여건은 계속 성숙될 것으로 예상되나, 그것이 정치적 수준으로 발전하기 위하여는 필수적인 연결고리가 없다. 그것이 바로 남북한 관계의 재조정이다. 다시 말해 남북한간의 대화재개 등을 통한 화해분위기가 형성되고 평화정착을 향한 발걸음이 빨라지기 전에는 위의 공산국가들과의 교류 등 보다 본질적인 관계개선은 어려우리라 본다. 신데탕트의 추세와 한국의 상승하는 경제력이 한국이 추구하는 북방정책을 위해 좋은 여건을 조성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안보나 경제외교의 차원을 넘어 통일외교의 차원으로 진입하기 위하여는 무엇보다 양 당사자간의 관계개선이 필수적인 것이다. 역시 돌파구는 스스로 찾지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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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관계는 계속 긴장과 갈등을 주조로하고 있지만, 최근 남북한의 양 당사자들은 적지 않은 변화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한국은 작년의 6월 민주항쟁 이후 미흡하나마 여러 생활영역에서 사회의 민주화가 움트고있고 이러한 추세는 남북한 관계에 있어 보다 유연한 대응을 예상케 하고 있다. 한편 북한은 KAL기 만행으로 체제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으나 상승하는 국제적 압력과 체제자체의 기능적 필요성 때문에 최근 한반도의 정세분석과 통일방안 그리고 경제전략 등 주요분야에 있어 점차 현실주의적 인식을 높이고 있는 조짐이 엿보인다.
이렇게 볼 때, 현재의 시점은 남북한이 기존의 냉전적 편집에서 과감히 벗어나 새로운 차원의 관계 설정을 모색하기에 더 할 수 없이 유리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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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은 남북한간의 재통일을 위하여 어차피 평화정책ㆍ상호교류ㆍ정치적 통일의 세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북한 간에 불신의 늪이 워낙 깊어 우선 평화공존의 틀을 마련하고 서로간의 심층적인 상호교류를 통해 국민적 일체감을 형성해야 무언가 정치적 통일의 길이 열리리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단계모형이다. 물론 여기서 선후가 꼭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평화협정이나 불가침조약과 같은 평화구조의 제도화에 앞서 남북한간의 상호교류를 증진시키는 것도 필요하며 쌍방간의 신뢰회복을 위해 오히려 필수적일 수도 있다.
신데탕트의 흐름 속에서 남북한간의 통일과 평화를 위한 대화모색에 있어서 우리가 절실히 생각해야 할 몇가지 명제는 다음과 같다.
1. 남북한은 상호 지나친 적대감과 공격성향을 버려야한다. 특히 우리의 경우 북한을 국제사회에서 고립매장 시키기보다는, 그들이 체제를 개방하고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으로 나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2. 통일정책의 논의 및 입안과제에 민족구성원 전체의 동참이 요구된다. 따라서 분단된 정보의 공개와 민주적 참여가 보장되어야 하며 그를 위하여 언론자유와 민간차원의 연구활동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3. 남북한간의 대화 및 협상, 그리고 교류는 다차원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며, 지나치게 관주도적이어서는 안된다.
4. 사상과 제도를 초월한 민족적 대동단결을 추구할 것이나, 통일의 명분으로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이 훼손되어서는 안된다.
국제적 상황이 아무리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유리하게 변화한다해도 종국에 있어 그것은 남북한 당사자의 결단과 주체적 의지없이는 한치도 진전될 수 없다. 끝내 그것은 우리 민족의 종교적 차원의 결단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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