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번에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네 가지 우상 가운데 두 가지를 고찰해 보았고、이번에는 시장의 우상(Idols of the Market-place)과 극장의 우상(Idols of the Theater)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예수님과의 만남이라고 하는 기도를 외면하고 현세적인 유혹에 빠져서「주 예수 대문밖에 기다리셨으나 단단히 잠가두니 못들어 오시네」라는 성가처럼 현세의 체면、욕망、이해타산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치하지 못하는 불행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 두 가지 우상의 실체를 파악해보고 다음의 우리 생활의 지침을 살펴보기로 하자.
시장의 우상
시장의 우상이라고 하면 인간 사회에서 상호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불행을 말하는 것이다. 곧 시장에서는 전달의 수단으로 통화가 사용되는데 인간 세계의 전달 수단은 인간 관계로 돌아가게 하는 언어가 시장의 통화 역할을 하는 것인데 그 통화가 서로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될 때 오해가 생기게 되며 바람직한 인간 관계를 수립하지 못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교란시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작은 부주의로 인하여 내가 아끼는 이웃에게 감정적인 말로써 아픈 상처를 들춰 낸다든지、사실무근한 거짓말로써 무책임하게 그 순간만 넘기는 임기응변 등으로 그리스도의 뜻에 어긋나는 삶을 영위하게 되는 불행을 심게 된다.
구약에 보면『태초에 말씀이 있었으니…』로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생명의 양식도 곧 말씀이요、너와 나의 세계가 한덩어리가 되는 것도 말씀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도 언행일치(言行一致)를 보이지 않는 사람은 불신하게 되고、또한 행동과 일치되지 않고 말만하는 사람은 지불 능력이 없이 수표만 남발하여 결국은 부도를 내고 이 사회에서 발붙일 곳이 없는 불행을 자초하게 되는 것이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들어 가리라』(마태오 7장 20절).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가운데 기도와 일치의 세계가 있음을 명심하자.
극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라고 함은 사상의 우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종합 예술이라 하는 연극에 비유해 보면 연극의 각본이 되는 것이 바로 사상인 것이다. 그 사상이 곧 연극의 주제가 되는 것이며 어떤 예술장르에서도 주제(Thema)가 없는 예술은 존재할 수 없음을 일컫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을 따르는 일념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분의 상상이 담긴「말씀」으로 생명의 양식을 삼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일치된 세상을 이뤄나가는 것이다.
사상은 총이나 칼보다도 더욱 큰 위력을 나타낸다. 부모형제도 사상으로 인하여 인간 그 자체를 변화시키로 민족도 바꿔 놓으며 산이라도 옮겨 놓을 수 있는 신념을 낳게 해주는 것이 사상이다. 수많은 전쟁의 역사 가운데 세계사에서 드물게 보는 비극이었던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은 결국 반만년을 이어온 국토와 핏줄의 한 형제끼리 물고 찢은 사건인 것이다.
남과 북이 헤어져 산지 불과 5년만에 그토록 처참한 양상의 다툼이 일어나게 된 근원은 무엇인가. 두말 할 것없이 사상인 것이다. 어떤 사상을 갖고 사느냐 하는 것이 한 인간의 생애를 좌우하게 되며 따라서 한사람 한 사람이 함께 어울려서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백성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상으로 사는 사람들임을 말했듯이、사상이 연극의 각본이라면 연극이 공연되는 한 무대에서 두 개의 각본을 사용할수는 없는 것이다. 가장 좋은 한 개의 각본만을 선택하여 온갖 힘을 다 쏟아야 할 것이다.
우리 속담에「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듯이、이것저것 뒤얽힌 세계의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이 그리스도의 말씀이이에 다른 우상에 젖어있다면 참으로 불행하게 될 것이며、전혀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특히 성체 성년을 맞은 우리로서는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생각하고 함께 행동하고 함께 걸어가는 우리에게 특별한 우상으로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으며 그래서는 절대 안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사상의 우상까지 간단히 살펴보았으나 끝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표 설정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얼마 전에「봉사」에 대해서 성서연구의 자매들과 함께 묵상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영원히 푸른 나무」에 대한 이야기다. 주님이 지으신 많은 피조물 가운데 자연이 있는 그대로 아름다우며 또한 수많은 삼라만상 가운데서 나무의 덕을 칭송한 많은 사람들의 글도 있지만 나는 빛을 발산하는 상록수에 대해 말하려 한다. 나무의 덕이 커서 항상 아낌없이 베푸는 입장에 있는 것은 봉사의 진면목이 되겠지만 특히 춘풍추우의 시련 속에 서도 끄떡 하지않고 오연히 우뚝 서있는 상록수는 그 찬란한 빛으로 인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리라. 구세주가 오심으로써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무수한 죄악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다시 살아나는 희망은 상록수처럼 빛나는 그리스도의 모습인 것을 새롭게 인지하면서 우리 모두의 삶이 영원히 시들줄 모르는 상록수가 될 때、그리스도의 삶과 일치하는 것이다.
절망하지 않고 언제나 희망을 갖는 빛나는 상록수. 그리하여 나와 이웃을 일치 속에서 화합하고 봉사하는 삶. 박해시대의 우리 선주들이 절망하지 않고 고귀한 피를 흘렸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은 더욱 큰 꿈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금강산의 사진이 일간지를 찬란히 장식하고、우리의 보도진이 평양에서 보내온 텔렉스기사가 소상히 보도되고 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 절망하지않고 꿈꾸던 우리에게 성모 승천의 대축일에 해방의 기쁨을 선물하신 주님께 우리는 다시「통일」의 선물을 기대하면서 이웃에 봉사하는 기쁜생활을 계속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써 우리는 봉사의 모범을 보게 된다. 훌륭한 봉사자는 영원히 빛을 발하는 상록수가 되며、이는 곧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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