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태운 여객기는 정시에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두주간의 그리 길지 않은 여행이었지만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때처럼 가벼운 흥분을 느끼며 입국수속 대에 갔다. 입국수속은 별문제가 될 것도 없지만 항상 그 앞에 서면 국민학교 시절교무실 앞을 지날 때의 마음이다. 내 여권을 본 직원이 로만칼라차림의 나를 보더니 묘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 나는 직원이 교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무집행중 개인감정표현은 자제해야 하기에 묘한 미소로 나를 쳐다보지만 이제 곧 나의 안부와 함께 자기는 어느 본당 교우임을 밝히며 기분 좋게 여권을 돌려줄 것이다. 지난번 귀국할 때도 세관에서 교우 분을 만나 얼마나 따뜻한 대접을 받았던가! 이런 기분 좋은 기대를 하고 있는 나에게『요즘 살기가 재미있으십니까?』라는 참으로 예상 밖의 질문을 해왔다. 순간 나는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마음에 긴장하게 되고 공무원의 질문으로선 너무 상식 밖인 그의 태도를 따졌다. 처음 만난 신부에게 사는 재미 운운하는 질문은 아무리 너그럽게 이해하려해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런 나의 태도에 그는 몹시 당황하여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하며 신부수업이나 생활이 무척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는 둥 갈수록 종잡을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여권을 돌려주었다. 덜 익은 감을 씹은 것처럼 떱떨한 마음으로 공항을 나오자, 형제신부 한분이 기다리고 있었고 곧 즐거운 기분에 휩싸였다. 저녁식사 후 수도원형제들과 만나 여행 중에 있었던 사연들을 나누다가 문득공항에서 있었던 떱떨한 기억이 나서이야기했더니 그들은 공범자나 된듯 역시 묘한 미소로 나를 쳐다보면서 어떤 형제가『요즘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으로 그 소문을 모르는 바보가 당신 외에 또 있겠느냐』라는 농담을 했다.
사연인즉 내가없는 사이에「가시나무새」라는 어떤 성직자의 불륜을 소재로 한 영화가 5회에 걸쳐 방영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시청해서 교우들 사이에도 큰 화제 거리라고 했다.
그제야 나는 그 공항직원의 묘한 미소와 질문을 이해하게 되었고 씁쓸한 상념에 젖게 되었다. 그 영화에 취해 있었던 공항직원의 눈에 로만칼라 차림의 내 모습이 잠시나마 가시나무 새로 둔갑한 것이다. 성직자나 수도자는 인간의 모든 약한 조건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이 원하시는 완전한 삶을 살기로 약속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살아야할 이상과 처지사이에는 항상 거리가 생길 수 있고 이 거리를 최대한으로 좁히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성인들은 이 거리를 최대한으로 좁혀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사신 분들이고 가시나무 새들은 불구자의 지체처럼 이상과 현실이 전혀 별개의 것으로 허우적대다 끝난 사람들이다. 성인들의 생애가 많은 선의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듯 가시나무 새들의 생애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꺼리의 좋은 재료가 될 수 있기에 과거에도 이런 내용의 작품이 많았고 또 사람들을 최대한으로 만족시키기 위해 어차피 도입되는 것이 과장된 내용과 표현이다.
가시나무 새의 저자는 이런 면에서 참으로 성공한 작가였다.
그녀는 개신교신자로서 고위성직자의 불륜을 다루면서 에로스의 세계에서 생길 수 있는 심리적인 갈등과 또 그 불륜의 씨가 다시 사제가 된다는 공상까지 끌어들여 그리스도의 모습을 살아야하는 성직자, 동물적인 욕구에 방황하는 사내, 부성애, 축축한 눈물을 적셔내기에 충분한 운명관계 등을 적절히 배합해서 여성적인 섬세한 필치로 그려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큰 흥미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수도생활을 이십년 이상 해온 불혹의 나이를 넘긴 내처지에서도 주님 종으로서의 내 모습이 갈수록 초라해지는 것 같아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많다. 종신서약을 하고 신품을 받고 젊은 혈기에 참으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면서 간혹 자기도취에 빠진 적도 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후회스러운 일이 더 많고 이런 후회를 디딤돌 삼아 새 출발을 하리라는 결심으로 살아가고 있다. 시야가 그리 넓지 못한 탓인지 마음이 너그럽지 못한 탓이지 아직 대단한 성덕의 경지에 있다고 여겨지는 성직자나 수도자를 그리 자주대하지 못했고 그저 약하고 부족하기에 나와 비슷한 수준을 맴도는 분들과 자주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도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어리석음에 빠져 자기 분수도 잊고 형제들을 판단하는 유혹에 자주 빠진다. 누구는 답지 못하게 너무 고급 취미생활을 하고 있어서, 누구는 머리가 부족하고 지도력이 부족하고 말주변이 없어서, 누구는 겸손치 못해서 등등.
그러나 이런 성직자나 수도자들도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과 싸우며 주님께 약속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다보니 가시나무 주위를 배회하는 새가 아니라 십자가 나무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실수와 시행착오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노력하는 허약한 사제들안에서 성인들에게서와 또 다른 모습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 성직자나 수도자의 타락이란 참으로 있어선 안 될 일이기에 더 흥미롭지만 불륜의 생활을 하던 새가 고위 성직자가 되고 또 그 열매가 사제가 된다는 구상은 너무 환상적이며 허구적인데 이런 환상의 가시나무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사제들을 바라보는 세태가 좀 서글프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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