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따라 구름따라 흘러가는 나그네 여정 속에 아름다운 인간상을 가지신 분들을 만날 때가 있다. 내 생애에 만난분들 중 잊을 수 없는 분들이 몇 분계신다.
그분들 중의 한분이 인도 켈커타에서 떠돌이 나환자들을 위해 소중한 일생을 바치고 계신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시다. 살아있는 성녀로 추앙받고 계시는 그분을 알게되고 인연을 맺게된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한다.
6년 전이다. 수녀님을 뵈옵고 그분에 관한 얘기를 TV에 보도한 적이 있다. 그 후 가톨릭모임에서 원고청탁이 들어와 그분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을 쓰기위해 성체조배도하고 묵상기도도 했다. 그분을 소재로 글을 쓴다는 것이 기쁨이고 행복이기도 하지만 수녀님의 거룩한 삶에 누가될까봐 망설였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번에도 방주의 창에 글을 쓰라는 가톨릭신문의 연락을 받고 몇 차례 사양을 하다 소명으로 알고 몇 편의 글을 썼다. 20년이 넘게 방송에 종사하면서 기사도 쓰고 프로그램 만들고 뉴스앵커 시사화제 사회자 등을 해봤지만 하느님과 관계지어지는 글을 쓸때는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고는 한줄의 글도 쓰기 힘들 때가 많다. 기도 중에 글제목도 생각이 나고 내용도 영성스러워지는 것을 여러차례 경험했다.
이번에도 방주의 창을 어떤 내용으로 쓸까하고 기도 중에 마더 데레사 수녀님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녀님이 오셨던 그날, 함박눈이 밤새도록 내려 온 산하가 모두 은백색으로 빛나고 있던 일요일였다. 이른 아침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보도본부 촬영부 일요근무자의 전화였다. 함께 수녀님을 취재하기로 돼있던 취재기자가 몸이 불편해 못나오니 부장님에게 잘 말해달라는 얘기였다. 알았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일요일이고해서 누구를 대신시키기도 어려운 상황이고 해서 옷을 주섬주섬 입고 여의도 회사로 달려갔다. 안양 라자로마을까지 가야되는데 시간이 촉박했다.
운전기사에게 천천히 가도 된다고 말은 했지만 마음은 급했다.
시간에 맞추지 못하면 수녀님을 뵈올 수가 없기 때문에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다행이 예정됐던 9시반쯤에 라자로마을 아록산 기슭에 도착했다. 밤새 내린 눈으로 라자로 마을과 성모마리아상 성당 종탑 아록산 모두가 은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에 아침햇살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마음속에 평화와 기쁨이 일렁이는 듯 했다.
잠시 후에 하얀 눈길을 뚫고 예쁜 물매미같은 폭스바겐 한대가 마을로 들어섰다. 이경재 신부님이 직접운전을 하시고 계셨고 차안에는 데레사 수녀님과 평화의집 원장이신 인도출신 루시아 수녀님 그리고 또 한분의 인도수녀님이 타고 계셨다. 일행은 성당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성모동산 앞에 내려 설경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김 프란치스꼬도 데레사 수녀님과 인사를 나누고 멋진 기념촬영을 했다.
데레사 수녀님을 가운데로하고 양쪽에 이 신부님과 내가 섰고 뒤에 같이 오신 수녀님과 마을수녀님들이 서셨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앵글이었다. 눈길에서 만난 마더 데레사. 이 한장의 사진은 우리 집 가장 좋은 벽면에 걸려있다.
수녀님의 한국방문은 두번째였는데 이번에는 나환자의 날을 맞아 구라주일을 한국나환자들과 보내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겨울인데도 샌들을 신으시고 광목수도복을 입으신 수녀님은 편안함을 주셨다. 눈동자는 빛나셨고 얼굴엔 평화와 기쁨이 가득해 보였다. 이마와 뺨엔 발이랑같은 굵은 주름살이 호수에 포물선일 듯 지어져 있으셨다. 농사를 지으시면서 여러 남매를 낳아기르며 뒷바라지를 하신 우리들의 할머니모습 그대로였다. 일을 많이하셔서 그런지 손마디가 굵으시고 손바닥엔 못이 많이 박혀 딱딱할 정도이셨다. 자그마하신 키에 약간 꾸부정하시고 거무스레한 피부색깔, 영낙없는 우리 할머니 모습이다. 그분 전체의 모습에서 거룩한 광채가 빛나는듯했다. 수도자의 영성깊은 성스러운 분위기가 있었다.
수녀님은 곧바로 라자로마을 성당으로 가셔서 구라주일미사에 참여하시여 특별강론을 하셨다. 수녀님 말씀은 이러했다.
일생을 오갈데 없는 떠돌이와 나환자들을 돌보며 봉사하면서 살지만 나같이 기쁨을 누리며사는 사람은 드물 것이라는 말씀이셨다. 병들고 가난한 외톨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잠재워주는 봉사활동이 생활의 전부라고 말씀하셨다. 수녀님은 그들 하나하나를 우리예수님을 받들듯이 돌봐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우리 죄를 대신해 고통 받고있고 굶주리며 보속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을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누가 돌보냐는 것이었다. 단 두벌의 수도복도 나환자들이 만들어 주었다고 하시면서 무척 기쁜 표정으로 자랑을 하셨다.
이런 말씀도 하셨다. 하루는 돌보고 있던 떠돌이 한사람이 배가 고프다면서 불평을 하길래 조용히 문을 열어 주면서「밥을 더 많이 주는 데가 있으면 그리로 가시오」하면서 우리 형편으로는 지금 양 이상을 줄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대문을 나선 그 사람은 흘금흘금 뒤를 보면서 나갔는데 며칠 후 문두드리는 소리가 나길래 열어보니 그 사람이 다시 왔더라는 것이다. 감사할 줄 모르고 투정을 부린 것 용서해 달라면서 다시 있게 해 달라고 애원을 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수녀님은 특별강론을 마치시고 미사가 끝난 후 나환자들과 성직자 수도자들과 함께 성당 밖으로 나오셔서 눈길을 밟으며 일행들과 함께 사제관을 향해 걷고 계셨다. 찰라적인 순간이었다. 손과 얼굴이 일그러진 나환자한사람이 수녀님의 손을 덥석잡았다. 일행은 당황해하고 있었으나 데레사 수녀님은 침착하게 또 다른 손을 그 나환자의 손에 얹어주시며「탱큐」하고 웃으셨다. 그분 말씀은 언론에서 나를「살아있는 성녀」「노벨평화상에 빛나는 수녀님」그렇게 보도를 해서 내손이 닿으면 병이 나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보통수도자를 성녀 대접해 주니 얼마나 감사하냐는 말씀이다.
눈이 많이 내렸던 그해 겨울、일요일 눈길에서 만난 마더 데레사. 나는 그분의 아름다운 인간상을 잊을 수 없다. 그날 몸이 아파 회사에 나오지 못해 내가대신 데레사 수녀님을 뵙고 취재를 하게해 기쁨을 누리는 계기를 마련해준 여기자에게도 감사하고 싶다. 판문점을 방문하시고 비무장지대에 기적의 패를 던지시고 난후 한반도의 통일을 기원하는 기도를 해주시던 수녀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데레사 수녀님이 이 땅에 좀 더 오래 머무르시어 이세상 밝히는 빛이 되게 하소서」하고 하느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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