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국립극단에 입단한 이래 거의 15~16년의 세월동안 일 년에 2차례씩(봄ㆍ가을) 정기적으로 지방 공연을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이 너무 많아서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꼭 한번 정리를 해 보고 싶었다. 서울과 지방의 상상외로 엄청난 문화 수준의 차이, 숙박시설의 미비, 관극 태도, 지방 관리들의 무지한 고자세 등은 때때로 나를 흥분시키고 또 때론 슬프게 만들었었다.
무엇보다 지방 공연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공연장이다. 서울공연에서 사용했던 세트(Set), 조명, 소품 등을 절반도 제대로 쓸 수가 없기 때문에 언제나 미흡하고 적당한 공연이 되고 만다. 몇 십 년 전에 지은 낡은 영화관을 빌려서 밤새도록 무대를 넓히고 막(幕)을 만들어 다느라고 우리 스텝(Staff)들의 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겨우 겨우 적당히 얽어 맞춰서 무대를 만들고 불결한 화장실 냄새가 코를 찌르는 명색만의 분장실에서 앉지도 서지도 못한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분장을 하노라면 가슴 가득 서글픈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막이 오르면 이번엔 관객들의 소음과 껌 소리 때문에 도저히 연극을 진행 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언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극장이나 운동장엘 가면 그렇게 습관적으로 껌을 씹게 되었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마음 놓고 뛰어 다니고 소리 지르는 어린 아이들을 조용히 하게하고 껌 소리를 멈추게 하기위해서 우리는 가는 곳 마다 막 오르기 전에 간곡하게 공연장에서 지켜야할 예의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지방을 다녀보면 그 지방의 문화발전은 전적으로 그 지방 관리들의 문화수준에 따라서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다행이도 그 지방의 시장이나 군수가 조금이라도 예술에 대한 관심이 있고 안목이 있는 곳은 극장도 생기고 좋은 관객도 만날 수가 있고 그렇지 않은 곳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무지하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아무리 작은 중소도시엘 가더라도 거대한 체육관을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높은 분들이 체육진흥에 지대한 관심과 취미가 있었던게 아마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물론 체력이 중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정신과 혼이 빠진 몸만 튼튼한 국민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아찔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공연장이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이 세종문화회관 같은 거대한 극장만을 생각해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7~8백석정도의 그 지방에 알맞는 아담하고 실용적인 공연장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우리는 기회만 있으면 입이 닳도록 얘기하지만 그 성과는 거의 없는 편이다. 어쩌다 몇 년 후 극장이 생겼다고 해서 가보면 그저 건물만 실속 없이 덩그렇고 아무 쓸모없는 새마을강당 같은 곳에 분장실 할 곳만 치장을 들여놓곤 한다. 그러나 그 분장실은 일 년에 몇 번 행사를 위해 그곳에 들리는 시장이나 고급관리들을 위한 시설일 뿐 출연자들을 위해서는 결코 사용되어지지 못한다. 이런 터무니없는 권위주의는 말단 관리들의 뼛속까지 스며있어서 우리가 아무리 그 부당함을 설명하고 싸워도 소용이 없다.
이런 어려움과 수난 속에서도 우리를 즐겁게 하고 보람을 느끼게 하는 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변해가는 지방의 관객들의 관극태도이다. 어느 해부터인가는 공연 전에 부탁을 하지 않아도 껌 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게 되었고 재미있는 장면이나 감동적인 대사에도 아낌없는 박수도 보내주곤 한다.
공연이 끝난 후 그 지방에서 어렵게 연극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관심 있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진지하게 공연 평을 하고 연극얘기를 할 때면 우리는 피로를 모두 잊어버린다. 곳곳엔 문화에 목말라 하고 문화를 접할 기회가 없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상상외로 많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사람들에게 문화를 수혈하는 일이다. 말로만 서울의 집중적인 문화를 분산 시킨다고 떠들 것이 아니라 당장에 지방마다 몇 백석의 극장이라도 정성껏 만드는 일이 시급하고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방법만이 찰나주의, 한탕주의에 물들어 있고 냉소와 열등감만이 가득한 지방민들을 구하는 길이고 지역 간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 지방마다의 고유하고 특색 있는 문화를 보호하고 살려서 자존심과 긍지를 키워주고 서울에서 공연되고 있는 여러 종류의 공연예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준다면 지역 간의 감정이나 갈등은 쉽게 해결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일 년에 두 번, 찌든 일상을 훌훌 털어버리고 며칠간만이라도 서울을 벗어날 수 있는 내 직업에 감사한다. 버스에 앉아 타성에 젖어 살아왔던 내 생활도 반성하고 차창으로 흘러가는 풍경도 감상하고 가난하고 찌들었지만 따뜻하고 맑은 심성을 가진 지방예술인과도 만나고 새삼스럽게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소중함도 알고-.
그리고 또 가족에의 그리움을 새삼 절감하기도 하고 가슴 가득 새로운 각오와 느낌으로 돌아오는 차안은 정말 즐겁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