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이슬처럼 의인을 내려다오』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천년을 기다리면서 하느님께 간절히 바랬던 염원이었다. 소돔과 고모라가 의인이 없어 멸망했던 것처럼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의인의 힘이라고 믿는다.
어쩌면 지금 우리나라의 사정이 소돔과 고모라의 위기의식을 줄만한 상태에 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도 의인을 기다리려는 마음이 간절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인은 2천년 전에 이미 왔다. 예수 그리스도는 1990년 전에 왔다. 그 분은 하느님으로서 인간이 되셨고 그분의 인간화를 성탄으로 기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이상의 의인은 아무도 없다. 아마 인류가 지상에 있는 한 그분 이상의 의인은 없으리라.
지금 우리는 대림절의 절정에 와 있다. 곧 있으면 크리스마스의 축제를 만끽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건 말건 이제 그 분의 탄생은 세계적 축제가 되었다. 온 세계가 이처럼 축제의 기분에 젖기는 힘들 것이다.
그 분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는 우리는 그 축제 자체를 다행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일단 구세주의 탄생을 받아들인다는 증거라고 보아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논리는 좀 억지스럽지만 손해될 것은 없다고 본다.
한편으로는 성탄을 전후로 해서 벌어지는 사회적 분위기는 우리 맘에 들지 않는 점이 너무 많다. 교회가 의도하는 참뜻과는 달리 세상의 아들들은 마치 취해서 놀아나는 기회로 알고 온통 야단들이 아닌가. 마치 그리스도의 탄생이 왕자들의 생일 날인양 술집마다 여관마다 사람들이 넘치고 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착한 이들에게 평화」가「하늘에는 분노, 땅에는 착한 이들에게 고통」으로 변질되지나 않았는지 몹시 두렵다.
교회의 전통도(잘은 모르지만) 성탄의 기념에 그 비중을 크게 두고 있는 듯하다. 지금 맞고 있는 대림절의 전례에서도 2천년 전의 그리스도 탄생을 기다리는데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마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매년 다시 탄생해야 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쉽다.
물론 전례 속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뜻도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너무 미약하고 잘 깨닫기가 어렵다. 전례의 그 심오한 뜻을 미처 깨닫지 못한 우매한 신앙인이기에 그렇다고 나무라면 더 할말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은「고요한 밤, 거룩한 밤」에는 아닐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탄과는 전연 다른 풍경일 것이다.
재림에 대한 성경의 말씀은 우리를 놀라게 하고 두렵게 까지 하고 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천체는 타서 녹아 버리고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없어지고 말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다 파괴될 것이니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라』 (베드로의 둘째 편지 3장 10~11절).
이제 우리가 기다리고 있어야 할, 아니 준비하고 있어야 할 분은 아기 예수가 아니라 큰 권능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언제 까지「구세주 빨리 오사」만을 노래해야 하는가.
그렇다. 지금은 2천년 전에 오셨던 아기 예수의 탄생을 그저 기뻐하는 식의 시대는 2천년이라는 세월로 족하다고 본다. 이제는 기쁨 보다는 두렵고 불안한 마음으로 대림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베드로 사도의 요구에 지금 우리는 대답해야 한다.
물론 성경은 우리들에게 그 해답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화해요, 진리에 대한 순종이며 인간끼리의 사랑이다. 이러한 해답들은 교회가 그동안 꾸준히 강조해온 덕목들이고 예수의 재림에 합당한 준비 태도임을 가르쳐 왔다.
하느님과의 화해와 진리에 대한 순종은 개인적인 면이 크겠지만 인간끼리의 사랑은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행위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리사회전체가 사랑으로 하나가 될때 비로소 맞이해야할 사건이 아닌가.
요사이 우리나라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자살을 죄악시 하는 신앙인들도 조차 자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얼마 전에는 철없는 어린아이들이 자살했다고 온 신문이나 방송이 떠들썩했다.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가 제 각기 다르겠지만 그러나 공통된 이유는 사람의 결핍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서로 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는 때 우리는 절망하고 그 절망이 죽음을 부르는 것이다. 전세 값의 인상 때문에 폭력배의 시달림 때문에 사람은 죽지 않는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랑을 나눌 수가 없기 때문에 죽을 수 있다. 우리사회는 점차 더 삭막해지고 무서워지고 있다. 한마디로 정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가정이나 직장, 그리고 학교에서도 마찬 가지 현상이다. 그래서 고독한 군중들이란 말도 있다.
이제 우리는 구세주를 기다릴 때라기보다 그 분이 우리에게 요구한 유언을 실행해야 할 때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그리고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예수의 다시 오심을 바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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