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사순절 동안에 두 번의 단식재와 여덟 번의 금육재를 지켜야 했다. 그런데 바티칸 제2차 공의회 이전에는 단식재(대재)만 하더라도 사순절 동안만 쳐서 여덟 번이요, 금육재(소재)는 연중 매 금요일이었으므로 너무 자주(?)지켜야 했었으니 요즈음 우리가 지키고 있는 단식, 금육재는 옛날에 비하면 약과(藥果)라 하겠다. 그런데 부활 판공성사를 도와주러 본당에 나가 교우들의 고백을 들으면 못 지켰다고 하니, 가뜩이나 분심(分心)많은 이 사람은 더욱 분심에 빠진다.
요즘 사람들은 사순절에도고기를 그렇게 많이 먹어서 금육재를 못 지키는가? 아니면 어쩌다가 한번 고기를 먹었는데 그날이 하필 금육일이었던가?
어렸을 때 교리반에서 수녀님이 대, 소재를 지키는 이유를 가르쳐주셨는데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예수께서 금요일에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으니 우리도 그날을 근심하며 우리의 죄를 보속하고 또 극기(克己)해야 한다고. 이 설명과 함께 몇 개의 성경구절이 뒤따랐는데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마태16, 24)『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약한 현실을 죽이면 삽니다』(로마8, 13)등이었다. 과연 인간에겐 자기의 욕심을 억제하고 다스릴 줄 아는 절제의 덕이 필요하다. 절제는 유혹력이 강한 욕망을 제어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 중에서 가장 큰 욕망이 무엇인가? 식욕(食欲)과 생식욕(生植欲)이다. 실제로 성서에는 먹는 것을 절제하지 못해 멸망의 길로 들어선 인간의 예들이 많이 언급되어있다. 아담과 에와도 따 먹지 말라는 과일을 따 먹음으로써 죄를 지어 낙원에서 쫓겨났으며, 배고팠던 에사우가 팥죽 한 그릇을 절제하지 못하여 야곱에게 장자권을 팔아먹었으며, 40일 동안 광야에서 재를 지킨 예수님에게 사탄이 제일먼저 유혹한 것도 돌을 빵이 되게 하여 먹어보라는 것이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이유가 거의 이 두 가지 큰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본다면, 우리교회의 단식재와 금육재는 먹고 마실 것이 풍부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히 의미 깊은 교회의 전통이라고 여겨진다. 먹고 마시는 것을 제대로 절제할 줄 아는 사람만이 다른 모든 것들을 절제할 수 있는 법이다.
사순절을 지낼 때 마다 생기는 분심꺼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금육재를 한국의 실정에 맞게 고치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즐겨 육식을 한다. 하루 세끼 식사를 육식으로 한다. 때문에 그들에게 사순절에 하루를 육식하지 말라면 그것은 그들에게 절제와 극기의 기회가 되겠으나 우리처럼 혹시 한 달에 한두 번, 혹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쇠고기를 먹는 국민에게 사순절이니까 금요일에 쇠고기를 먹지 말라고 한다면 과연 그것이 극기가 되겠는가?
도시의 샐러리맨 교우가 사순절 중 금요일에 어디 가서 육류가 안든 메뉴를 찾겠는가? 돈 천원 정도 주고 사먹는 음식 중에 고기가 한 점도 들어있지 않는 그런 메뉴가 거의 없는 형편에 금육재를 지키고 싶은 샐러리맨 교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기를 안 먹으면 되니까 비싼 일식(日食)집에 가야 하나? 육류 안 먹으려다가 생선회를 오히려 더 맛있게 잘 먹어서 절제와 극기한다는 의미가 사라져도 괜찮겠는가?
그리하여 어떤 분은 금육일에 육류(肉類)를 못 먹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즐겨먹는 김치를 먹지 말아야, 그것이 절제가 되고 극기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제안한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서양의 식사에서 육류는 주식(主食)이지 반찬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 나는 스파게티를 아주 좋아하는데 한번은 이태리에서 스파게티를 배불리 먹었는데 그 후에 진짜 주식인 쇠고기 스테이크가 나왔지만 전혀 손도 못된 경험이 있다. 이태리 사람들은 스파게티를 전식(前食)으로 먹고, 육류와 채소를 주식(主食)으로 먹는다는 것을 몰랐었기 때문이었다. 김치는 우리에게 있어서 반찬이지 결코 주식이 못되는 것이다.
우리가 주식으로 먹는 것은 밥이다. 쌀밥과 보리밥(요즘은 이보리밥이 건강식에 포함될 정도로 귀하게 되었지만)과 오곡밥이다. 서양 사람들이 금육일에 육류를 안 먹음으로써 절제와 극기를 하는것과 비슷하게 되려면, 금육일에 김치를 안 먹는 것이 아니라 밥을 먹지 말아야한다고 본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서 금육일은 금미일(禁米日)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생각해 보자. 3백 65일 중에서 3백일 이상을 하루세끼씩 꼭 밥을 먹는 입인데, 그렇지 않아도 안 먹는 고기인데 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 하고 밥을 먹지 말라는 것하고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어느 것이 더 극기가 될 것인가?
누가 만일 『사순절 금요일에 밥을 못 먹게 하면 그날에 맞춰서 오히려 고기를 실컷 먹으려 들게 아닌가?』하고 미리 걱정을 한다며 그분에게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비록 이날이 금육일에서 금미일로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절제와 고신극기의 의미가 있는 날인데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일부러 불고기를 먹자고야 하겠는가라고. 금미일이라고 해서 밥을 안 먹으며 그럼 그날 뭘 먹는다? 일부러 불고기파티를 벌일 수는 없고, 그렇다고 서양 사람들이 해먹는 감자 삶은 것을 내놓을 수도 없고…이날을 밀가루 음식 먹는 날로 권장하면 어떨까?
우리 샐러리맨 교우들이 외식하더라도 아무런 양심의 갈등 없이 금육일에 아니 금미일에 식당에 가서 국수ㆍ우동ㆍ자장면ㆍ라면ㆍ냉면ㆍ울면 등을 시키면 되지 않을까? 만일 금육일이 분식일이 된다면, 금육일임을 알고도 사먹을 것이 없어서 못 지켰습니다고 하는 교우들은 사라지겠지? 원하건대 개인소득 5천불을 바라보는 한국인신자들에게 사순절에 절제와 극기의 의미를 심어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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