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외에 위치한 초대교회시대 그리스도 교인들의 지하묘소였던 까따꼼바는 이세상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느낄수 있게 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박해시대에 집회 소나 피난처로 쓰였던 까따꼼바에는 로마에서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이후 그위에 기념성전이 세워졌고 8세기경에는 까따꼼바에 있던 유해를 도시의 성당으로 운반하면서 일반인의 발길이 끊이고 잊혀져 있다가 고고학자의 문헌확인에 의해 16세기에 다시 발견되어 오늘날 성지와 관광지로 함께 각광받고 있다.
그리스도교 박해의 산물인 까따꼼바는 그 구성 배경과 재발견 과정에서도 구원자의 섭리가 숨쉬고 있음을 쉽게느낄수 있다.
까따꼼바의 지질은 특별한 연장 없이도 쉽게 파헤쳐지지만 파헤쳐진 땅은 공기와 접촉하면서 시멘트와 같은 견고성을 지니기 때문에 그리스도 교인들이 박해를 피하는데 천혜의 요새로 이용됐었다.
지난 81년 까따꼼바 순례시 까따꼼바의 형성과정과 재발견을 설명해주던 한국인 유학생의 고백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신자가 아니었던 이 유학생은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관광안내원으로 일하면서 까따꼼바를 알게되었고, 까따꼼바를 설명하면서 구원자의 오묘한 섭리를 체득, 스스로 영세했노라는 것이었다.
까따꼼바의 재발견과 감히 견줄수는 없는일이지만 최근 미리내성지 무명순교자 묘역에서 재발견 된 이윤일 성인의 묘소는 우리에게 시사하는바가 많다.
103위 한국 성인 가운데 가장 늦게 순교(1867년 1월 21일)하여 103번째 한국성인이 된 이윤일 성인의 유해는 참수를 당한후 신자(이도마)에 의해 대구 관덕정 형장 부근에 가매장되었다가 날뫼(現 비산동)로, 날뫼에서 용인 먹방이로, 그리고 1976년 6월 24일 용인 먹방이에서 미리내 무명순교자 묘역으로 미각 이장됐으며 순교1백29주년을 맞아 순교지인 대구로 되돌아가 유택을 마련하게 된다.
순교한후 두 번의 갑년(甲年)을 지낸 성인의 유해는 가매장까지 포함 다섯번만에 제 위치로 돌아오는 셈이다.
이윤일 성인의 묘소가 최근 재발견된 것은 외조부로부터 구전을 통해 전해들은 최재용 신부의 관심과 노력, 그리고 순교자 현양사업에 전력투구한 신자들의 열성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윤일 성인의 묘소를 재발견하게 해준 결정적인 요인은 1922년부터 1923년 사이에 프랑스선교사인 조선교구 보좌 드브레 유 주교에 의해 작성된「1866년 병인년 순교자묘지 조사록」이라는 문헌이었다.
까따꼼바의 재발견이 수백년만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것이 문헌에 의한 것이었음을 생각할때 역시 문서에 의해 64년만에 재발견된 이윤일 성인의 묘소는 구전과 역사기록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준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64년전에 작성된「병인박해 순교자 묘지 조사록」에는 『순교자 요한 이윤일의 무덤이 대구에서, 용인 먹방이로 이장됐다』고 간략히 기술되어 있을뿐이지만 그동안 구전에 의해 「순교자 이요한」의 무덤으로만 전해진 용인 먹방이의 순교자 이요한의 무덤이 이윤일 성인의 무덤임을 입증하는 키 포인트가 된것이다.
이윤일 성인의 묘소는 1922년 시복추진의 일환으로 순교자묘지 조사록에 소재지가 용인 먹방이로 기록된후 46년만에 시복됐으나 정작 시복식(1968년 10월 6일) 때는 묘소의 위치를 명확히 확인할 수가 없어 추정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은 교회와 나라가 격동기를 살아왔기 떄문이다.
그나마「복자 요한 이윤일의 묘소일 것」이라는 추정도 구전이 없었다면 불가능 하였을 것이고, 문서확인도 결국 구전이 다리를 놓아준 셈이되였으니 역사의 기록성과 함께 구전의 중요성도 더욱 강조됨직하다.
이윤일 성인의 묘소는 현재 기록문서상에는 대구에서 용인먹방이로 이장된 연도기술이 없어 계속해서 보완확인작업중에 있기는 하지만 새삼스럽게 당시 한국교회의 사목을 주도한 불란서 선교사들의 철두철미한 기록정신에 감탄을 금할수가 없다.
이윤일 성인의 묘소 재발견을 통해 우리가 취해야할 교훈은 무엇인가.
무명 순교자 묘소 발굴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이 이루어져야 하겠다. 필요하다면 상설 기구를 설치하고, 순교자에대한 구전을 취합하고 이윤일 성인 묘소 발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순교자묘지조사록」을 비롯「순교자 시복 추진 교회재판 증언록」등 기록문서를 전면적으로 확인하는 연구작업과 이 문서의 번역작업도 병행돼야 할것이다.
어는 성인의 유해가 무명순교자 묘지에서 숨쉬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이윤일 성인의 묘소 재발견이 이를 확실하게 입증해준 만큼 늦추거나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된다.
순교자가 많기 떄문에 무명 순교자가 많기도 하지만 무명순교자가 많다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우리들의 무명순교자들에게 이름을 찾아주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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