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세한지 일 년이 조금 넘는다. 그래서 먼저 믿어온 많은 사람들의 신앙적 태도를 유심히 바라보게 된다. 신기한 것은 할머니들에게서 성실한 신앙의 모습을 보면서 감동케 되고, 지식계층의 사람들에게서는 그렇지 못한 신앙을 보면서 회의하게 된다. 신앙을 위해서는 지식이란 정말로 하찮은 세계임을 아프게 깨닫게 되기도 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지식이 신앙의 장애요인일 수 있음을 놀랍게 발견케 된다.
나는 영세하기 얼마 전에 어느 책에서「대중식당에서도 저쪽 멀리에서 성호 긋는 사람을 보고 반갑게 달려가 교우의정을 나눈다」는 대목을 읽고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다. 그 풍경을 상상하면서 가슴 두근거리는 즐거움을 얻곤 했다. 나도 영세 후 낯모르는 교우에게 식당에서「반갑습니다」하고 인사하면서 기쁨을 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신자가 되어 생활해 오고 있지만 그런 황홀한 기대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고 있다. 분명히 교우라고 들었는데 성호 긋기를 하지 않고 있으며, 애써 식당 안을 두루 살폈을 때에는 아주 드물게 할머니나 아주머니에게서 그것을 발견하게 될 뿐이다.
왜 성호 긋기를 하지 않을까? 음식물에 대한 고마움의 기도는 신에게 바치는 신자의 의무이자 기쁨이 질 않는가.
그것을 사소한 것으로 무시하고서도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한 의무와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여러 사람 속에서 마치 신자의 티를 내는 것 같은 생각 속에서 겸양의 필요성을 인정한 나머지,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일까? 또 쑥스럽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가톨릭교 자체가 쑥스러운 종교이기 때문이라는 말과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식사 때의 성호 긋기가 쑥스럽다면, 기도하며, 성가를 부르며, 성체를 받아 모시며, 축복의 인사를 나누고, 봉사하는 일 모두가 쑥스러운 일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또 우리가 귀찮아서 혹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또 성호 긋기를 하고 싶지만 번번이 잊어버리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을 법한데「신께서 바라는 모든 것들을 내가 하고 싶은데 번번이 잊어버리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변명과 다를 바가 조금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신앙은 훌륭한 용기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의 자신 있는 모습을 드러낼 때 비로소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럿이모인 자리에서도 겸손한 마음을 모아 성호 긋기를 부끄럼 없이 한다면, 우리들에게 다른 모든 것들이 고마움의 대상으로 새롭게 변화하면서 다가올 것이 아닐까?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진실한 신앙의 기쁨 속을 거닐게 하는 것이 아닐까?
김영수<대구대명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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