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선벌악이란 말이 있다. 착한일은 상을 받아야 한고 나쁜 일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윤리원칙이다. 이것은 모든 종교인들뿐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나 동서고금을 망라하여 아무 저항 없이 통용되는 원리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유공자에게 그 공을 감사하고 격려하는 포상제도와 악행을 제재하는 징벌제도가 실시되고 있다. 노벨상과 같은 각 분야 전반에 대한 세계적표창 제도가 있는가하면 과학부문이나 예술분야 등의 각 분야별의 시상제도도 마련되어 있다.
국제적인 제도도 있고 국가단위의 제도도 있다. 그 외에 사소한 단체에도 그와 같은 시상제도를 가지고 있으면서 일정한 시기에 유공자를 표창한다.
이런 풍조에 편승하여 우리교회도 뒤질세라 전국적 또는 교구별로 또는 단체별로 포상제도를 마련하고 활발히 포상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교회의 유공자라고 하면 주로 교회에 돈을 많이 바친 사람 혹은 선교에 노력봉사를 아끼지 않은 사람들이다. 예를 들자면 자선행위를 특별했다든지 레지오 단원으로서 전교에 공이 큰 사람 등이다. 우리 교회는 이런 사람들의 공을 세상에 알리면서 표창하고 있다.
유공자들에게 감사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같은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것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를 위하여 자기재산의 일부를 바친다든지 노력봉사를 하는 것은 자발적인 신앙행위이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의 신앙행위를 세상에 공개해가면서 포상을 한다는 것은 과연 복음적인가하는 문제는 생각해 볼 만한 것이 아닌가? 신앙은 본시 하느님의 은닉성에 대한 자유로의 운동이며 현재에서 미래로, 미완성에서 완성에로의 과정인데다가 이것이 근본적으로 은총이다.
주어지지 않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은총에 의해서 어떤 선행을 했다면 사회적 책임감에서보다는 하느님께 향한 지향에서 그 일을 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사회적 어떤 갚음을 바라고 그런 선행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도 안 될 일이다.
과연 예수께서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을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마태6, 3~4) 라고 가르쳐 주신다. 사람한테서 갚음을 받고자 해서 선행을 했다면 그것은 신앙적으로 보아서 가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을 위해서 한 선행이라면 그것은 하느님 앞에만 간직해두어야 가치가 있는 것이다. 깨끗한 지향의 신앙행위가 표창으로 인하여 그 순수성에 손상이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실은 예수께서도 이점을 내다보셨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말라. 그들은 받을 상을 다 받았다』(마태6, 2) 선행에 대한 사람들의 칭찬이 짙어지는 바람에 이제 선행을 하되 자기선전의 한 수단으로 하는 풍조가 성직자와 평신도, 심지어는 수도자들 간에까지도 성해지는 것 같다.
교회에 많은 헌금을 한 사람 중에는 그 사실을 공포하고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도 생겼고 상을 받기위하여 자선행위나 전교를 하는 사람도 눈에 띄게 되였다. 신문이나 잡지에 자기 선행을 자랑한다든가 기도나 선행하는 모습을 카메라 앞에서 연출하는 것들은 신앙행위치고는 우스꽝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스스로 나팔을 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기서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위선행위까지나 오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위선자들에게 하신 힐책의 말씀은 무서운 것이다.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같다…이 뱀 같은 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피하랴?』
여기에 또 따라오는 파괴적 결과가 있다. 묵묵히 자기 선전없이 희생을 무릅쓰고 일하는 사람은 인정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무슨 부당한 이익이라도 갈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는 경향이다. 그리고 세상에 드러나는 것만 선행으로 여기게 된다. 우리 교회 안에는 세상에 알려진 선행 외에도 하느님 앞에만 쌓여진 값진 선행이 더 많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저변에서「과부의 헌금」과 같은 착한 행위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 교회가 주님의 은총에 의해서 살아간다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표창 대상자들이나 현세 사람들 앞에 위대하다고 소문난 사람이 은총의 기회가 되겠는지, 아니면 저변에 숨어있는 무언의 희생자들이 은총의 기회가 되겠는지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교회의 포상제도는 그 공평성마저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교회의 은인들을 기억도 하지 말고 그들에게 감사하지도 말란 말이냐. 이것은 배은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반문이 나올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은인들에게 감사해야한다.
그러나 세속적 방법이 아니라 즉 눈에 보이는 몇몇 뛰어난 사람들만 가려서 상을 줄 것이 아니라 우리 나름대로의 방법, 신앙인다운 방법을 연구해 내야 한다. 예를 들면 은인을 위한 기도의 날을 정해서 은혜받은 모든 이가 은혜를 베푸신 하느님과 또 그 은혜를 중개한 모든 은인들을 기억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정성되이 올린다면 어떻겠는가?
우리교회는 쇼맨쉽으로써가 아니라 진리를 묵묵히 실천함으로써 강해지고 발전한다. 로마 3백년 박해시에 우리 교회는 강했다. 모든 영화와 권력을 누리며 세상에 위세를 떨치던 중세기에 우리교회는 타락했었다. 개인의 신앙생활 역시 마찬가지이다.
숨겨진 봉사와 희생으로 그 신앙은 강해지고 파급효과가 크게 되고 그것을 세상에 드러낼 때에 이미 오점이 나타나기 마련이고 그 공로는 교만이나 이기심의 발상지로 변하기 마련이다.
보화는 보물 상자 안에서 더욱 빛나고 빛은 어둠속에서 더욱 세상을 밝혀준다. 죽으면서 살고, 지면서 이기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지혜임을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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