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선생님은 우리과(사학과)의 과장 교수님이셨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선생님을 소개받았는데 나는 저렇게 젊은 분이 어떻게 과장교수님이 될 수 있나 하고 깜짝 놀랐어요. 그때 선생님은 40대 중반으로 내가 놀랄 만큼 젊지는 않으셨는데도 아무튼 내 눈에는 그렇게 청년처럼 당정하고 젊어 보이셨다. 우리들은 선생님에게 동양사를 배웠었는데 강의실에서의 선생님은 언제나 너무도 따뜻하고 안온하셔서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었다. 중국사를 강의 하실 때의 선생님의 눈은 유난히 빛나고 열정적이셨다. 중국에서 선생님은 입시정부김구 주석 밑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청춘을 바치셨고 돌아가신 장준하 선생님과 함께 조국을 탈환하기 위해서 험한 군사훈련을 받으셨으며 피 끓는 열정으로 미군 비행기를 타고 조국에 내리는 순간 행방을 맞이하시는 감격을 맛보셨으니 그러실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얘길 나중에 선배들에게서 들었다. 선생님은 머지않은 장래에 꼭 중국과의 교류가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갖고 계셨다.
『멀지않은 후일에 꼭 여러분들과 함께 중국의 아름다운 도시 소주나 항주에서 중국 미녀들을 옆에 앉히고 술잔을 기울이는 날이 오리라고 확신 합니다』는 선생님의 강의에 남학생들은 신이 나서 손뼉을 치곤하였다. 안경 속에서 선생님의 눈빛은 언제나 안온하고 따뜻했으며 우리 몇 안 되는 여학생들은 지극한 선생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았었다.
우연히 연극에 정신이 팔려 연습 때문에 심심찮게 강의시간을 빼 먹는 나를 선생님은 한 번도 꾸중하시지 않고 이해해주셨다. 예술에도 지극한 사랑과 깊은 조예를 갖고 계셨던 선생님은 당신의 제자가 연극을 하는 걸 오히려 대견해하셨다. 연극을 제대로 잘하려면 역사와 철학을 알아야한다고 말씀해 주셨던 선생님!
그러나 선생님의 불성실한 제자였던 나는 어느 날 역시 선생님의 제자이고 나의 선배이기도 한사람과 사랑에 빠져 졸업도 하지 못하고 결혼 때문에 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결혼 후에 다시 연극을 시작했고 그로부터 30여년이 넘게 한 길을 걸어오면서도 나는 언제나 내 모교를 생각하면 우리 선생님을 생각하곤 했었다. 선생님은 한결 같이 마치 울타리처럼 학교를 지켜주셨고 동창생들에게는 선생님은 언제나 모교의 상징이셨다.
선비중의 선비이신 선생님은 그러나 절대로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으셨고 상해 임시정부시절의 그 애국심을 평생 잃지 않고 살아오셨다. 유신시절, 온갖 달콤한 유혹을 물리치신 선생님의 얘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드디어 선생님은 모교의 총장이 되셨고 서슬 푸르던 5공화국 시절 데모와 최루탄가스의 캠퍼스에서 그저 문교부의 꼭두각시 노릇밖에 하지 못하던 각 대학의 총장들 가운데서 선생님은 유일하게 학생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총장님 이셨다.
그러나 선생님은 데모 주동학생을 무조건 처벌하라는 당국의 강경한 지시에 항의하시다가 결국 총장자리를 내놓고 마셨다. 「총장사퇴 결사반대」라는 이색적인 학생데모가 연일 모교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얘길 듣고 공연히 가슴이 뭉클하고 목이 메이던 기억이 난다. 그해 연말 동창생들 망년회에서 얼큰하게 취하신 선생님은 남편과 함께 참석한 나를 알아보시고 몹시 반가워하셨다.
『이 자식 어느 날 슬그머니 학교에서 없어졌더니 자네가 데려 갔더군. 아무튼 연극을 하고 있다는게 대견하고 반가워』하시면서 꼭 친정아버지처럼 내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날 우리는 2차로 선생님 댁까지 몰려가서 쌓인 회포를 풀었다. 중국시절 만나서 결혼하셨다는 그 역시 독립 운동가의 따님이신 사모님과 중국 노래를 이중창으로 부르시는 선생님을 바라보면서 자꾸만 콧등이 시큰해졌다.
『학생 놈들이 데모를 할 때면 꼭 내방 창문 앞에 와서 광복군의 노래를 부른단 말이야.』
하시면서 웃으시는 선생님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 것 같이 보인 건 나의 착각일까? 바르게 살고 바른 소리를 하기가 정말 어려운 시대에 선생님 같은 분이 거목처럼 조용히 버티고 계시다는 건 얼마나 든든하고 큰 힘인가. 6공화국이 태어나면서 선생님에게 총리자리를 제의 했었다는 얘길 들었다. 남편과 나는 밤새도록 토론을 했다. 그 건으로.
남편은 이제 선생님 같은 분이 나오셔서 바른 정치를 하시고 나라를 옳게 끌어가시는 것도 옳다는 얘기이고 나는 아직도 그럴 시간과 여건도 되질 않았기 땜에 선생님이 구정물에 발을 담그시지 않길 바람에서였다.
전혀 그럴 생각이 없으신 선생님께서 못난 제자들의 이런 토론을 들으셨다면 두 사람 모두의 생각에 일리가 있다고 잔잔히 웃으셨으리라 생각한다. 세상이 복마전 같고 불의가 태연히 판치고 대접받을 것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이 시대에서 그래도 선생님 같은 분이 계시다는 건 커다란 희망이고 한줄기 신선한 샘물이다. 우리선생님 같은 분이 이 시대에 열 분만 살아계셔도 우리나라는 진작에 달라 졌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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