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잡으려고해도 흘러가는 것이 세월이라고 하듯이, 또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마당에서 여러가지 상념에 잠기게 된다. 정묘년 새해에는 제발 부정하고 잡스런 것들이 모두 물러가고 삶을 풍요롭게하는 복이 박처럼 둥글둥글 우리네 삶에 굴러 들어왔으면 하는 기본적인 생각도 없지 않다. 옛부터 수많은 종족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재액을 피하고 복을 제례 속에 살려왔다. 우리 민속을 보면, 언제부터인지 우리 선조들은 정초가 되면 지신밟기를 해왔다고 한다. 새해를 맞이하여 일년동안 만사형통하기위해 덕담을 하고 또 복을 불러들이는 초복의식이 있어야한다고 옛사람들은 생각했다. 충청도「시골뜨기」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여느 친구들처럼, 오색 천조각이 들어있는 달걀꾸러미가 얹혀있는 시골집 담장나무 곁을 등교길에 지나칠 떄마다 침세번 뱉고 깨금질 세 번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런 동작은 어린 내게는 당위적인 의식(儀式)처럼 엄숙함과 두려움 가운데 이뤄졌고, 그래야만 동티를 미리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었다. 명오가 얼리면서부터 나의 이 반복적인 행위에 대한 반성이 어렴풋이 생기기 시작했다.
해가 바뀔 때마다 다짐하는 것이지만,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바르게 해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다그치며, 새해엔 온누리에 평화의 서광이 내려쬐기를 간절히 바라고 싶다. 거룩한 교회의 위대한 주교학자인 성 아우구스띠누스에 의하면「평화」는 전쟁이나 분쟁에 대립되는「만물질서의 평온함」을 뜻하는 말이다. 평화는 참된 질서의 확립에서만 이룩될 수 있다.
이런 그리스도교의 사상을 바탕으로 요한 23세의 회칙「지상의 평화」는 개일, 사회, 민족, 구가간의 문제, 특히 권리와 의무의 관계에 있어서 진리, 정의, 사랑, 자유에 의거하여 사회질서가 확립되고, 이 땅위에 평화가 정착돼야함을 강조하며, 우리 모두가 평화건설의 역군이 돼야함을 촉구하고 있다.
세상만사가 그럴듯이, 우리는 감나무 밑에 누워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격으로 평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오늘날처럼 평화를 위한 우리의 투신과 참여가 절실하게 필요한때도 없을 것이다. 특별히 우리사회의 평화를 기원하고 또한 평화는 가능하다는 전제 아래 나는 다음과 같이 새해의 소박한 꿈을 꾸어 본다. 허나 노력을 들이지 않고 꾸는 꿈은 몽상이고 허망한 신기루 같은 것이다. 이런 꿈은 그야말로 마취제 같은 것이어서 사회 개선에의 의지를 마비시키고 평화에의 열망을 말려버린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그리스도교 신자의 책임을 다할 때 이 세상의 어두움은 알게 모르게 그리스도의 빛에 의해 걷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이렇게 할 때「사욕을 버린다」든가「마음을 비운다」든가하는 언사는 진정한 의미를 얻게 되리라고 믿는다. 우리의 마음이 참다운 삶의 의미로 충만하게 될 때 세상의 평화는 가능하게 된다. 외형적이고 상대적인 가치에서 알맹이 있는 가치, 절대적 가치, 즉 복음적 가치에로 우리 삶의 방향이 전환될 때 평화는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오늘날 회자(膾炙)되고 있는 권력의 정통성과 도덕성의 시비 문제 따위는 다시 제기되지 않을 것이고 사회 민주화에의 탄탄대로가 우리 앞에 열릴 것이다. 구태여 정치인이나 기업인을 예로 들고 싶진 않지만 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솔선수범하여 사회의 공동선과 공익을 우선하는 정신에 살 때 많은 어려운 문제들이 순조롭게 풀려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만하면 졸부(猝富)가되는 파렴치한 작태와 문어발식의 기업 확장으로 치부하는 기업경영의 파행성이 청렴정신과 기업윤리의식에 의해 교정된다면 우리사회의 병페와 상처는 상당한 정도로 치유되고 아물게될 것이라는 원론적인 생각도 해본다. 이런 교정이 이뤄지지 않을때 얄팍한 월급봉투를 신주처럼 모시고 사는 대다수의 보통사람들은 울분과 회의가 누적되어, 사회는 또다시 위화감과 불신의 늪으로 빠져들 것이다.
이런 분위기속에서는 증오가 독버섯처럼 움트고 사회갈등은 심화될 것이다. 사회에서의 신뢰 회복은 시급한 것이며 이것은 양심이 우대받고 불의가 비난될 때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세계에는 분명히 윤리적 선과 악이 공존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인간의 구원자」에서 교회는 인간들 사이에 사랑이 증가하고 타인들-각 인간 국가 및 민족-의 권리에 대한 존중이 증가하는가 아니면 반대로 각종의 이기심, 진정한 애국심과는 거리가 먼 국수주의(國粹主義), 자기의 합법적 권리와 공적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타자들을 지배하려는 악습 등이 횡행하는지 어떤지에 대해 인간존업의 수호자로서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강조하여 천명한다. 인간은「무엇을 가졌느냐」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인간이냐」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의회의 가르침이며 이런 인간관은 성서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있다. 교회가 인권의 수호와 신장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그 본연의 사명에 속하는 것이므로 이런 과제를 얼마나 책임있게 수행하고 있는가를 교회는 언제나 반성해야 한다. 아무도 잠자는 교회를 원치 않을 것이다. 교회는 인권이 사회평화와 국제평화의 기반이 된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선포하고 실천하려는 교회는 인권문제와 관련하여 이 사랑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잘 터득해야 한다. 지금은『잘 미워하면 사랑한 것이고 잘못 사랑하면, 미워한 것이다』라고 갈파한 성 아우구스띠누스의 말씀이 무엇을 뚯하는가를 새삼 되새겨봐야 할 때이다.
우리들 그리스도교신자의 삶은 영성적 삶에서 완성되어가고 영성적 삶은 기도로부터 그 자양분을 얻는다.
영성의 참다운 의미를 깨달아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 안에서 우리들 스스로가 늘 거듭나는 일상을 살아야한다는 다짐과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이 우리 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라는 확신을 더욱 굳히면서 새해에 온 가정과 사회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깃들기들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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