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날씨가 곱다. 이른 아침 상쾌한 마음으로 일어나 그날 있을 일을 생각해보며 들뜬 기분으로 새벽미사도 드렸다. 마침 이날은 추석이라 신자들도 꽤 많았다. 모두가 나름대로 일 년 농사의 풍요로움에 하느님께와 조상님들의 은덕에 감사하고 있었다. 하루의 모습이 모두가 밝게 보여졌다. 헤어지는 이사도 추석 잘 지내기를 격려했다. 그러나 이런 명절일수록 사제들에게는 오히려 허전한 날이 된다. 흔히 오는 전화도 쉽게 만나보는 사람도 이날만큼은 잠시 행방이 없다. 철저히 혼자되는 날이다. 어쩌면 전날 먹다 남은 밥술로 스스로를 떼워야 할 신세가 된다.
그해 추석도 마찬가지였다. 덜렁 던져진 모습으로 잠시 의자에 앉은 것이 잠깐 눈이 감겼다. 아침부터 굶어야하는 팔자가 되어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자신이 봐도 애처롭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요란한 초인종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나서는데 이게 웬걸, 헐레벌떡 달려온 중년신자 부인이다. 사뭇 흥분해있다. 대뜸 내뱉는 소리가 『갈 데가 없어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배고파 도와달라는 소리가 아니다. 들어본 즉슨, 아버지 추석명절을 쇠러 자식들이 모두 모였는데 글쎄 명절 쇠다 말고 아들놈들이 대판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모처럼 만났는데 글쎄 이놈들이 하도 싸워서 에미 힘으로는 도저히 뜯어말릴 수가 없었단다. 거리가 꽤 멀었는데도 그렇게 해서 달려왔고, 와서 싸움 말려 달라는 것이다. 도대체 명절 같은 때는 어느 집도 선뜻 찾아가기 힘든 판이고, 그래서 그런 날은 잊어버리는 것이 관례다 싶어 철저히 혼자가 되는 것도 서러운데 듣는 나로서도 멍할 뿐이다. 속마음 같아서는 뭐라고 한마디 내뱉고 싶은 충동이 불쑥 솟아오르지만 억지로라도 참아야 한다. 특히 이런 경우는 더욱 다르지 않는가.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함께 가기로 마음먹었다. 명절의 들뜬 기분이고 뭐고 다 접어두자. 오죽했으면 이런 날인데도 사제를 찾아 왔겠는가하는 마음에서다. 막 나서려는데 글쎄 아들놈이 그래도 엄마를 뒤따라온 것이다. 미안하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에서 죄송합니다가 연발 나온다. 몇 마디 충고와 더불어 달래 주었지만 잊지 못할 추석이 되면서 그 후부터는 좋은 날이 될 때마다 강조하는 말이 있다. 어떤 경우이든 우리 신자들만큼은 그날대하는 모든 사람들과 기쁘고 즐겁게 웃으면서 지내는 하루가 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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