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 전래 2백주년이 1984년에 기념되었으니까 이른바 전교 3세기로 접어든지도 이제 벌써, 3년째가 된다.
그 2백주년 행사를 우리가 참으로 성대하게 치르면서 스스로 다짐하는 좋은 말들도 많이 했다. 즉「우리는 조상들의 장렬한 순교나 팔아먹고 있을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나름의 십자가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를 생각하자」「민족 복음화로 향한 선교 제3세기!」등 표방하는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교회 주변을 살펴볼 때 과연 「선교 제3세기」에 걸맞는 무슨 두드러진 각성이 소통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저 그날이 그날일 뿐 타성적 일상에 젖어 세월에 떠내려가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저 이렇게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연약한 인간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서에서도 바람과 구름을 보며 일기를 짐작하는 사람들이 시대의 징후를 알아 보려하지 않음을 질책했고, 또 늘 깨어 있으라고 하지 않는가.
나태하게 맹목적으로 사는 삶, 죽은 물고기 모양으로 흰 배를 하늘로 드러내고 누워 탁류에 마냥 떠내려가는 죽음과 같이 생명감이 없는 삶은 우리 신자들의 마땅한 자세일 수가 없다.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는 재창조의 과업은 얼마나 크고 끝없는 책무인가. 그런데 우리 교회는 과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름대로는 근래 우리 한국사회에서 천주교회에 어떤 기대를 걸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우리 한국 사회의 현실이 하도 희망이 없는 어둠을 헤매이고 있는데서 빚어지는 상대적인 일말의 기대일 뿐이다. 물질적인 외형으로야 오늘의 서울만한 도시가 얼마나 풍요롭고 멋들어져 보이는가. 그러나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가슴 안에는 고작 물리적인 힘 정도가 민주주의의 에너지인양 여기는 언어도단의 사고 방식 앞에 주눅 들고 벙어리가 된 것 같은 허수아비로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우리 사회현실을 가리켜 교회 쪽에서 더러 비판과 저항의 소리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요는 교회가 미리 이 사회에서 소금과 누룩의 일을 잘하고 있었더라면 사태가 이렇게 까지 악화될 수가 없었다는 점에 우리의 생각이 미쳐야 할 것이다.
이른바 「복음화」라는 것이 무엇인가. 무슨 신비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인가. 또는 개인적인 기복을 읊조리는 열성인가. 그런 것들이 아니고 우리 인간들이 하느님의 자녀답게, 참으로 인간답게, 양심적이고 평화적인 삶을 사회의 전반적인 상황 안에 조선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민주화가 못되는 것도, 또「7년 연속 풍년」을 한쪽에서는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농가 1호당 부채가 3백 70만원이라는 농수산부 통계가 노출되는 것도 다 본질적으로는 교회의 책임이라고 하면 좀 과장일까. 아무튼 신앙인들이 이 사회 안에서 누룩의 구실을 못해 이 사회를 민주주의라는 빵으로, 자립경제라는 술로 만들지 못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이와 같은 본질적인 책임을 느낄 때 다시 우리 교회는 먼저 자체내부를 점검하는 것도 순서일 것이다. 과연 우리 교회 내부에서는 모든 일이 모범적으로, 정의롭게 잘 되어가고 있는가. 2백주년 때 전국적으로 애써 만든 사목회의 문헌들은 지금 잘 활용되고 있는가, 교회 안에 격심한 빈부격차 현상은 없는가. 시골의 가난한 공소라든가 상계동 천막교회는 그런대로 존재할 수 밖에 없고 서울에서 10억 20억을 들이는 맘모스 성당은 그것대로 지어야 하는가. 교회 기관에 고용된 평신자들에게 신앙심으로 봉사하라는 루의 인색한행위는 없는가. 수도원 대교구의 사목협의회가 비록 자문역으로서라도 민주적인 활력이 있는 운영을 하고 있는가.
민족통일 문제를 자나 깨나 염두에 두고 북한에 버려진 침묵의 교회를 위해 성의를 보이고 있는가. 세계가 지금 기민하게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데 우리사회의 기업이나 스포츠가 중국 대륙에 깊이 침투해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지난날의 우리 연길교구에 현연감을 갖는 교회 지도자가 있는가.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행인지 불행인지 1만명이 순교했지만 순교를 감수한 능력 자체는 참으로 위대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른바 선교 제3세기를 맞는 우리 교회에서 양심에 못 이겨 순교의 길을 가는 이가 실제로 있는가. 그래도 가장 혈기가 있다는 젊은 사제들 혹은 정의 구현 사제단 혹은 청년회 같은데서도 선후배사이에 세대 격차와 체질의 차이, 사고의 차이가 신속하게 교체되어 나간다는 말을 들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각자가 어떤 신념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지 않으며, 임기응변식의 신경질적 반응 아니면 일시적 객기 비슷한 성질의 인격을 가지고 이른바 정의니 평화니 사회 참여를 거론하고 있는 말을 하면 이것 또한 지나친 지적이라고 항변할 사람이 있을까.
우리교회가 일종의 시국 문제로도 보이는 이른바 민주화에 관심을 두고 어떤 노력을 모색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바로 인간본성에 맞고 복음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밖의 다른 이유는 교회로써 절실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 속수무책 같은 민주주의의 시련에 대해서 교회는 눈만 멀뚱멀뚱 뜨고 바라보다가 또 무어라고 좀 중얼거리다가 다시 주저앉고 그래도 되는 것인가. 이것이 선교 제3세기의 복음화 노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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