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할 말이 없다. 인간이 인간 앞에 무력할 수 밖에 없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인간을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물고문 도중 질식사 한 것으로 경찰의「자체조사」결과 밝혀진 서울대 박종철 군의 죽음은 어처구니 없다 못해 말을 잃게 한다.
『남들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데 넌 물먹고 물로 돌아가누나.』
물론 모 일간지 만화에 비추어진 그림이었지만 숨진 박군의 시체를 화장, 강물에 뿌리면서 눈물을 흘리는 부친의 모습은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과 함께 이 땅의 현실에 대한 분노로 떨게 한다.
한쪽에선 민주화, 선진조국을 줄곧 외치면서 또 다른 한쪽에선 인권회복, 인간의 존엄을 내세워 온 이 나라가 어쩌다 이 모양 이꼴이 되었는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법을 지켜야할 경찰의 손이 어떻게 귀중한 한 생명을 어이없이 짓밟을 수 있단 말인가.
말로만 듣고 설마하던 현실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한 이 땅의 백성들에겐 미래마저 없는 듯 암담하기만 하다. 그 암담함은 이제 한껏 피어나야할 젊음이 고문이라는 폭력 앞에 희생당했다는데 그치지 않고 그의 죽음을 통해 그와 유사한 사례들을 너무나 확연히 예상할 수 있다는 것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다.
이 시점, 부천 성고문 사건이 연상되는 것도 당연한 논리로 받아들이게 된다.
박군의 희생은 아들과 딸들을 경찰의 손에 맡기고 있는 무수한 부모들의 가슴을 더할 수 없이 조여들게 하고 있다.『내 아들은 얼마나 많은 물을 먹었을까.』 『내 딸은 물속에 얼마나 많이 처박혔을까.』『제발 목숨만이라도 무사했으면.』
이미 경찰의 손에 자녀들을 맡기고 있지 않은 부모들이라 하더라도 부모 된 심정은 한치도 다를 수가 없을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다시없이 소중하다. 그 소중함은 너와 내가 다를 수가 없다. 우린 모두 하느님의 모상, 그분의 영을 받고 태어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귀하고 존엄한 인간의 생명이 무자비한 고문에 의해 희생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이 나라가 인간 사회이기를 포기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고 부끄러운 처지인 것이다.
법이 존재하는 궁극의 목적은 인권의 보호다. 인권을 보호하는 법을 지키기 위해 인권을 빼앗는다면 그 법은 이미 효용가치를 잃는다. 당국은 이 땅의 법이 더 이상 효용가치를 잃기 전에 물고문 사건을 명쾌히 밝혀야 할 것이다.
사건의 진상은 물론 더 이상 이 땅에 고문이라는 폭력이 발 붙일 수 없도록 결심을 해야 할것이다.
끝으로 졸지에 아들을 잃은 박군의 가족에게 김수환 추기경의 위로의 말로 아픈 마음에 조금이나마 동참하고자 한다.
『경찰 수사관의 가혹행위, 즉 고문으로 죽게 된 박군을 위해 기도하며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큰 슬픔과 실의에 빠져있는 박군의 부모와 그 형제들의 고통에 마음으로 동참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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