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도 저물어가는 대림 주일
나는 그날 오후 신부님의 가정 면담을 도와 드리는 일로 신부님 옆방에서 교적정리를 돕고있었다.
회색의 낡은 쉐타를 걸친 75세 가량의 할머니가 신부님과의 면담을 마치고 걸어 나오며 내게 인사를 하신다.
『할머니, 날씨가 춥죠, 앉으시지요』자리를 권했다.
할머니는 무엇인가 초조하고 불안한듯 망설이셨다. 한동안 우물쭈물하시다가 마지못한듯 내앞에 교적카드를 조심스럽게 내어 놓으셨다.
카드엔 한달에 3천원씩 한달도 거르지않고 도장이 선명히 찍혀있었다.
『저…』하며 할머니는 어렵게 서두를 꺼내셨다. 『저…우리아들 혼자 벌어서 일곱 식구가 먹고사는데 지난 여름부터 실직을 해서』금새라도 흘러나올 듯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할머니 지난 일 년동안 3천원씩 내시느라고 힘드셨죠』라고 운을 떼자 그제야 어렵게 말을 이으신다.
『그래요. 우리 아들이 실직을 해서 내년도 교무금을 올릴 수가 없어요』
『할머니, 그러면 교무금을 한 천원 정도만 할까요. 아드님 취직이 될 때까지만요. 』이런 나의 제안에 할머니는 정색을 하시며『교무금을 어떻게 깎습니까. 그렇게는 못해요. 그저 금년처럼 3천원씩만 내도록 해주세요』하신다.
나는 말없이 카드에 3천원이라고 써넣었다. 그리고 신년달력을 드리며 새해인사를 하고 할머니를 배웅해 드렸다.
얼마 후 몇명의 세대주와 면담을 끝내고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게 웬일인가. 그 할머니는 아직도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분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용기를 얻은듯 들어오시며, 『5백원만 올려주세요. 내 어떻게든 3천 5백원씩을 내겠어요』하신다.
순간 나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잊어 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하든지 한달에 5백원씩을 더 내겠다고 할머니.
그 결정을 위해 추운 날씨에 25분씩이나 서성이며 고민해야하는 할머니.
할머니의 눈에는 어떤 큰 결심 끝에 마음의 평화를 찾고 마치 주님을 뵈올 수 있는 자격을 얻은 듯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순간 내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며 나도 모르게 콧등과 눈시울이 젖어옴을 느꼈다.
나는 얼른 일어나 할머니의 손을 꼬옥잡고 자리에앉았다.
『할머니 꼭 3천 5백원씩을 내셔야겠읍니까』목이 메어물었다. 할머니는 납작한 가슴에 손을 얹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네. 꼭 그렇게 해주세요. 어떻게 해서든 3천 5백원씩 꼭 내겠어요』
나는 순간적인 갈등을 느끼며『할머니 정 그러시면 교무금을 그대로 내시고 주일마다 헌금을 백원씩만 더 내세요 없으시면 못내셔도 되구요』라고 말했다. 당황의 순간. 주님의 뜻이 그리고 교회법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내 혼자 결정하여 이야기한 것이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 모르면서 그런 말을 하다니…
그러나 자신있게『네 그렇게 해도 되니까 괜찮아요』라고 할머니를 안심시켜 보내드린 후 조용히 기도를 했다.
『주님! 제발 저 할머니가 교무금 때문에 또한 헌금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게 해 주시고 그 분의 건강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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