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어떤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전체로서의 사회도 그 사회가 달성하려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오늘 날 한국사회의 그것은 「민주화」혹은 「민주주의의 안정」이다. 정부ㆍ여당ㆍ야당ㆍ학생ㆍ근로자ㆍ지성인ㆍ중산층…어느 누구도 이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막상 「민주화」, 「민주주의의 안정」이 무엇을 말하며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기초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많지 않거니와 더구나 이에 대한 해답은 아직도 분명한 것 같지 않다. 「민주화」란 한마디로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인식의 확립과 그것의 생활화를 말한다. 추구하는 목적가치에 대한 기본적인식과 그것의 실천의지는 내일을 위한 역사의 조향타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라는 목적가치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이를 생활화하려는 확고한 의지는 내일을 향한 힘의 원천이다.
우리는 누구나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을 실천할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또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인식과 그 실천의지란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발생지인 영국이나 프랑스의 경우에도 백오십년내지 이백년의 세월을 두고 많은 학자들의 철저한 연구 분석과 때로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처절한 현실에 대한 양심적 비판을 감당했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 인식이 형성될 수 있었다. 이러한 양심적 비판과 피맺힌 현실 체험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땀을 흘리다 못 해 피까지 흘릴 강열한 의지를 표출시켰기 때문에 민주주의에의 의지는 역사의 의지로 확립될 수 있었다.
민주주의는 땀과 피로 얼룩진 역사적 학습을 통하여 얻어진 인류의 귀중한 자산이다. 「민주화」라는 점에 있어서 우리사회가 후진국임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후진국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울리 없으나 이를 솔직하게 수용할 때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하여서는 큰 장점이 된다. 서구의 민주화과정은 우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의 역사적 실험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학습 능력에 따라서는 민주화의 과정에서 피할 수도 있었던 「피와 땀의 낭비」를 절약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적 연대성이며 또한 인류애의 공동체적 기초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 꽃필 내일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기본인식과 실천의지를 인류의 민주주의 발달사와 관련시켜 철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와 우리 후손들의 피를 아스팔트 위에 뿌리지 않고 따뜻이 심장에 담아두기 위한「땀흘림」이기 때문에 한갖 상처에 불과한 우리의 후진성을 파헤치는 과정의 아픔은 참고 견뎌야 할 과제라고 하겠다. 이 땅의 민주화를 말하면서도 이 아픔을 피해보려 한다면 그것은 기만과 망상에 지나지 않는 허구이다.
지난 2ㆍ12선거를 계기로 다시 활성을 띄기 시작한 민주화에 관한 국민적 관심이 표출되면서 민주화를 위한 여러 가지 의견이 공식적으로 발표됐다. 서로 충돌되는 주장을 담고 있는 의견들이 많으나, 놀랍게도 모든 의견들은 한결같이 민주화에 대한 공통된 기본적 이해의 틀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① 경제성장에 의한 사회의 다원화는 ②이해의 충돌과 갈등을 초래했으며 ③이 갈등은 반드시 조정되어야 한다. ④조정을 위해서는 토론과 타협이 필요하며 ⑤토론과 타협을 통하여 조화와 중용을 실현할 수 있으며 ⑥그 목적은 국리ㆍ민복이며 따라서 조화와 중용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쟁은 파괴적 경쟁일 뿐 선의의 경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 여섯 단계가 원만히 이루어지는 것이 민주주의이며 그 실패의 원인은 조화와 중용을 외면하는 정치인들의 당파성에 있다』대부분의 정치적 발언들은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위와 같은 기본적 인식의 틀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
①과 ②는 객관적 사실이다. ③에서부터 문제가 있다. 과연 모든 갈등이 조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일까? ④에도 문제는 있다. 토론이 필요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모든 문제들이 모두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타협이 불가능한 문제는 과연 없을까 ⑤에 이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조화는 무엇이며 중용은 또 무엇인가? 우상과 합리성도 조화와 중용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상과 합리성 사이에는 토론이란 아예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타협을 추구한다면 그 타협은 또 어떤 것이 될까? 국리ㆍ민복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국민은「주는 복을 받아 누리는 수혜자(受惠者)에」 불과한 맥빠진 소비자란 말인가? 선의의 경쟁이 토론과 타협을 위한 것이라면 가장 선의의 경쟁인 스포츠를 생각해보자. 타협으로 끝난 경기를 관중들은 사기극이라고 야유하지 않을까? 모든 종류의 경쟁에는 반드시 심판관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세상에는 공자나 석가나 예수와 같은 사람들만 모여 살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란 주먹이 아닌 토론을 통한 정치「게임」이다. 선수는 정당이라는 단체들이며 경기 시간은 4년이다. 경기시간이 종료되면 「국민」, 좀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유권자」라는 심판관이 경기의 승패를 선언한다.
심판관의 깃발과 호루라기가 자유스러워야 선수들의 반칙도 줄어들게 되다.
우리 모두의 가슴을 도려내는 「죽음의 고문」도 심판관에 대한 원색적 폭행이다. 그 잔인성은 극에 달한 악마적 소행이다. 비마저 내리는 어느 날 오후 핏덩이 아들을 키우느라 마디가 굵어진 그러나 더 없이 따뜻한 그 어머니의 손으로 태워도 태워도 타지 않은가. 큰 아들의 하얀 뼛가루를 얼어 불은 강바닥으로 흩날리며 「哲아-! 자-알- 가그레이」마지막 가는 길조차 걱정스러워 한번 만이라도 「잘 가기를」기원하며 오열의 피를 삼켜야 했던 어느 애절한 어머니! 그 어머니의 입이 심판의 호루라기를 물게 되는 그 날에야 이 땅에도 민주주의는 꽃필 수 있으리라. 그 어머니의 호루라기 소리는 미카엘과 가브리엘 천신의 나팔 소리와도 같이 어리석은 무리들을 깨워 주리라. 그러기에 민심은 천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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