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에 받은 충격이나 강한 인상이 두고두고 오래 남는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일이다. 동족상잔의 피 비린내 나는 6ㆍ25전쟁을 치룬 얼마 뒤라고 생각된다. 내가 살던 시골의 학동들은 읍내에서 그 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산꼭대기에 살고 있다던 정체모를 사람에 관해 이따금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아마 그 이야기의 내용은 어른들에게서 주워들은 것이었으리라 생각되고 어떤 부분은 추측과 상상으로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 당시 화제의 주인공은 그렇게 늙지는 않은 이로서 긴 수염을 늘어뜨리고 산발한 것처럼 덕수룩한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바위굴속에서 독서에 몰두한다고 하여 어린 학생들에게는 전설이나 고사 속에 등장하는 도사나, 세간사를 잊고 초연하게 사는 기이한 인물로 생각되었다. 우리들 꼬마들은 그에 관해 한참 잊고 지내던 중 그가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 뒤 이 전설적 인물은 우리들 사이에 잊혀버리게 되었다.
후문에 의하면 그는 공산주의 서적을 탐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6ㆍ25 전쟁의 와중에서 수많은 애국인사들과 죄 없는 사람들이 부르조아 혹은 제국주의자란 낙인이 찍혀 납치되거나 학살되었고, 이 중에는 신자와 성직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공산군이 퇴각한 뒤 공비토벌이 시작되었고, 농촌에서는「빨갱이」잡는다고 대창을 든 동네사람들이 온 동네를 들쑤시며 다니던 것을 본 기억이 아직 내 뇌리에 생생하다. 그때 나는 왜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또 죽여야 하는지 하는 의문이 떠올랐고, 지금도 이 문제의 실마리는 명확하게 풀리지 않고 있다. 개인이나 단체, 국가들 사이의 모든 분쟁의 화근은 아마 자기중심주의적인, 인간중심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이런 이데올로기에 의해 개인이 개인을 미워하고 집단이 다른 집단을 미워하며 국가가 다른 국가를 침략하는 사례를 우리는 숱하게 많이 알고 있다. 나는 모든「-주의(-主義)」는 좋지않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역사적으로 생각해 볼 때 전쟁이나 불화는 이데올로기에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또한 인간이 오만하여 자기분수를 모르고 주제파악을 못하여 하느님을 부정하고 자신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 놓으려고 한 경우를 우리는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많이 들 수 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바벨탑」의 이야기가 그렇고, 계몽주의적 인본주의적「진보신앙」도 그중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이라고 해서 사태가 크게 달라져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나는 이제「인간은 무엇인가?」하는 인간학의 근본물음에 대한 대답이 복음적으로 보다 분명히 선포돼야할 때라고 생각한다.
전체적이고 근원적인 인간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의 일부측면만을 부각시켜 왜곡할 때, 이런 태도는 벌써 이데올로기적인 안목에 의해 오염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교황 요한 23세는「어머니와 교사」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사회론은 참된 현실과 관계있는 것이지, 결코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라고 천명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Imago Dei)을 지님과 동시에 원죄의 상흔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 모두는 상기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을 멀리 할때 인간은 결국 불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적대관계 속에서 미워하고 분쟁을 일삼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무신론에 신중하게 대처해야한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거부함으로써 인간이 참으로 자유롭게 된다고 하는 주장이 모든 형태의 무신론의 요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올해 대학입학생 면접시간에 나와 동석한 어느 원로 교수님이「학생은 어떤 철학책을 읽었느냐?」고 물었을 때, 읽었다고 대답한 학생들 중 대다수가 쇼펜하우어ㆍ니이체ㆍ사르뜨르의 책을 읽었다고 대답하는 것을 듣고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많은 책을 읽고 생각을 넓혀야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감수성이 강하고 예민한 젊은이들이 어떻게 그 내용들을 비판적으로 소화할 수 있으며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그들이「편식」하고 있는지, 그들을 탓하기 보다는 출판업자들의 그릇된 유행심리와 장사 속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의 출판사와 신자들이 협력하여 그리스도교의 문학ㆍ철학ㆍ신학분야의 좋은 책들을 우리사회에 내어놓는 것이 시급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무신론 중에서 가장 교묘한 사상내용과 술책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이 맑시즘이다. 그래서 맑시즘은 맑스를 위시한 그의 추종자들이 말한 역(逆)의 의미에서 「백성의 아편」이다.
오늘날에도 「맑시즘과 그리스도 신학」사이의 논쟁은 원리의 싸움이다. 우리가 삶의 보배로 받아들이는 복음은 사랑에 의해 우리를 자유롭게하고 해방시킨다. 이때「해방」은 맑시즘의 계급투쟁에 의한 해방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고, 우리는 맑스주의자가 되지 않고서도 이 세상에서의 착취와 비참을 분석할 수 있고 극복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 중요한 물음은, 그리스도교 신자와 맑스주의자들이 일치를 이룰 수 있느냐하는 점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적 공동체로서 이 물음에 긍정적으로 대답하는 것은 무신론에 영주권을 허용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 어느 독일학자의 말을 곱씹어본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성직자가 강론대에서 무신론을 선포하고 강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점을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한다.
독일 신학자 한스퀴의 말대로, 교회는 사회진보에 의해서도 또한 계급이 없게 된다는 공산사회의 이상에 의해서도 주어질 수 없고 오로지 하느님의 선물로서만 주어지는 복음을 전파하여 완전한 정의의 나라, 값진 자유, 꺽일줄 모르는 사랑, 보편적인 화해, 영원한 평화를 이 땅에 심어 키워 나아가야한다고 나는 고집스럽게 주장하고 싶다. 이렇게 할 때 우리사회 구성원의 진정한「의식화」즉 복음에 의한 의식화가 촉진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복음은 이데올로기와 동일시될 수 없다. 왜곡된 사상으로 혼돈되어있는 우리사회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기쁨과 용기, 위안 속에서「영원한 당신」을 바라보며 그분의 나라에 동참하게 하는 구원의 메시지라는 것을 명심하면서, 우리는 미사때 마다 되풀이하는「신앙고백」(Credo)을 더욱 힘차게 합창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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