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사느냐하는 것보다 무엇 때문에 사느냐 하는 문제에 부딪쳐 나름대로 생각에 잠기는 경우가 있다고들 한다.
자기가 하는 일이 좋은 일이라고 여길지라도 남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은 경우가 있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이 크게 도움을 주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자주 남으로부터 비판이나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이 퍽 도움이 되는 일이 된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면 대개가 바른말을 하면 인지적으로는 수용하는 듯 하나 감정적으로는 거부감을 보이게 된다.
남으로부터 충고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자세는 마치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하여 몇 과정을 밟아가는 것과도 비슷한 면을 갖게 된다. 마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는 포로의 경우처럼 말이다.
처음에는 수용에 대한 불안 공포 등으로 가득 차 그저 그것에 대한 저항심으로 마음이 차게 된다고 한다. 그 다음단계로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그저 감각이 없어 멍청이가 되는 상태에로 시키는 일이나 하게 되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별다른 의미 없이 먹고 쉬고 하는 것에 마음을 쓰게 된다고 한다.
그 다음단계에서는 심한고통 속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거나 아름다운 자연을 느끼며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끼리 나름대로 유모어로써 비정의 세계에 대한 고뇌에서 벗어나려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어 그곳에서 의미를 추구하게 된다고 한다.
인간적 삶이란 다른 이와 함께 하는데 그 맛이 있는 것이기는 하나 함께하는 과정에 문제가 생기면 그 맛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럴 때 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기에 하는 생각보다 무엇 때문에 함께 있어야만 했던가하는 원망스러움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기도 한다.
만약 우리들이 같이 살아야 되는 이유가 분명하면 그 목적에 잘 접근하기 위하여 좋은 방법들을 강구하면 되는 것이지 그 본래의 목적을 집어던져서는 안 될 것이다. 현대인이 서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특성으로는 사람을 사귀되 극히 자기중심적이거나 먼저 자기이익을 두고마치 자기가 다른 사람을 위해 있는것 처럼 타인중심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주는 것과 받는 것이 매우 계산적이어서 어쩌면 지극히 합리적으로는 보일런지 몰라도 비정하기가 이를 데 없는 경우마저 있게 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기능적관계라고 불리우리 만큼 일중심의 관계로서 필요한 일 때문에 관계를 맺었다가 그 일이 없어지면 무관한 상태로 되돌아가는 모습들도 볼 수 있다. 거대한 사회조직이 움직여가기 위하여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면 할 말이 없을는지 몰라도 조직을 위하여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위하여 조직이 있다는 논리가 틀리지 않는다면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될 것이다.
교회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단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단체와는 달라야한다. 사실 다른 단체와는 다른 모습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왕왕 세속단체보다는 달라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오히려 하느님의 뜻에 걸맞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솔선하여 보여주신 능동적으로 고난을 수용하는 의미를 몸소 체험케 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리스도를 닮아야하겠다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그것 때문에 받게 되는 고통이면 능히 받을 수 있어야 되겠는데 나약하고 성숙되지 못한 인간성의 발동으로 짜증을 내고 불평을 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런데 신자라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멍에를 짊어졌다고 느낀다면 그것도 그럴 수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자신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르겠다는 결심을 한사람들이라면 달라야한다. 특히 조직적으로서의 교회라는 관점에서 그 구성원들 간의 인간관계를 살펴보면 실망을 갖게 되는 일도 있다. 그것도 지도자적 입장에서 교회 일을 많이 한다는 사람들 중에서 말이다.
인간은 각기 자기의 전문적인 기능이나 능력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은바있어 그대로 분수에 맞게 성의껏 성실히 수행하면 된다. 그런데 위치질서 역다 할 질서를 여겨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게 되면 그렇게 된 사람이란 있는 곳에 있어야 제 가치를 갖게 되는 법이고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지 못하는 주제에 남들이 하는 영역까지 넘나보면 간섭하여 이들 그르치는 일이 있게 되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 보다 못하게 된다.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일들을 알아서 잘 처리하기 때문에 그곳에는 어떤 규지나 지도가 필요 없다는 교만한 생각에 처한 노릇이라 볼 수 있다.
다른 한면으로는 개성이 강하고 직업적인 특성이 있기 때문에 각각의 주장이 나름대로 일리가 있기 때문에 의견의 표현이나 주장이 다양하기 때문에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논어에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나 소인은 화이부화(和而不和)란 말이 있다. 학력이 높고 전문적인 기능을 가질수록 개성이강한 반면 남을 이해하는 능력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이치에만 합당하면 곧 순응하게 되는 좋은 점을 갖게 된다.
그런데 성경에서 가끔 읽게 되는 율법학자들의 삶의 태도는 그들이 학력이나 당시 사회적인 지위가 낮아서 그리하였는가하는 반문을 받게 될런지 모르겠다. 이것은 참 진리를 바로 알아듣지 못하는 지식으로만 무장된 사람들은 차라리 무식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 비하여 몇천배 더 해로움을 준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일수 있지만 혼자 살아갈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부단히 남과 관계를 이루어나가야 한다. 인간적인 방법들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개발되고 그것을 체험한다 하더라도 그곳에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 없다면 항상 불안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살과 피를 나누어가지는 한부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무엇 때문에 사느냐는 문제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문제도 같이 풀어가야 하는,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기에 우리들의 사귐에는 두려움도 어려움도 없어야 하리다.
지금까지 수고해주신 안득수 교수ㆍ손숙씨ㆍ이종한 신부ㆍ구병진 신부께 감사드립니다.
이번호부터는 장혁표 교수ㆍ김규동(시인)ㆍ이종철 신부(수원조압본당수임) 임보영 수녀(보라매청소년회관 기획부장)순으로 집필해 주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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