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종철군! 그의 죽음으로 온 땅은 애도 속에 잠겼다. 다 알다시피 행정당국에서는 박군이 그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의심을 가지고 박군의 자백을 받고자하며 비인간적인 고문을 가해 치사케한 것은 인간의 기본권을 짓밟은 짓이며 그 사실을 방관한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는 의식으로 사회의 자성과 반발의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우리 교회에서도 추도 미사니 성토대회니 시위니 하며 고문행정을 타도하고 독재정권 및 장기 집권 타도, 언론 자유 등을 외치며 나서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이들과 함께 인권의 피켓을 드높이 세운채 돌아보는 아픔 속에 할 말을 잃어야하는가? 그것은 나를 포함한 우리 교회가 과연 그렇게 앞장서 나설만한 자격이 있겠느냐하는 의문이 늘 내안에서 커다란 회의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잘못을 채 알아보지도 않은채 이리저리 처리해버리는 행정을 하나의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삼고 있는 우리 교회에서, 잘못을 알아보는 과정의 부담성을 과연 규탄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나」아닌「너」를 향하던 카인의 손가락에서 인류 비극의 싹이 튼 것은 두 말할 여지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내 눈의 들보 보다는 남의 눈의 티를 보고 저럴 수가 있는냐고 손가락을 쉽게 올리고 있다.
차제에 국가 행정당국이 아니라 교회 안에 내재하고 있는 정신적인 죽음의 요소들을 자성해볼 필요를 느껴 사제의 길 35년을 걸어오며 느꼈던 몇가지 점을 내 눈의 들보를 보는 자세로 담담히 제언해 보고자한다.
독재자는 반드시 장기집권을 하기 마련이어서 오늘날에는 일인 장기집권이 독재정치의 필수조건이 되다시피 되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장기간 행정을 하다보면 타인의 의견을 무시하게 되고 자신의 행정능력만을 고집하게 마련이다.
거기다가 편의와 자신의 욕심이 가해져 마침내는 공동체를 위한 행정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충족의 방향으로 내닫게 되는데 이런 독선을 가장 강하게 뒷받침해 주는 것이 바로 영구 보장 제도이다. 이같은 행정이 민주화의 가장 큰 지장이라 하여 우리는 그 무엇보다 일인 장기 집권을 막아야한다는 핵심적 관점을 터득하게 되었고, 이런 관점에서 현행헌법을 바꾸자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우리 교회내의 많은 수도회에서도 장상의 임기를 기한제로 개정했으며 장기간을 단기간으로 단축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기전에 현시대에 적응하는 필연적 요청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교계제도에서 만큼은 아직도 이러한 시도를 꿈도 꾸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국가 행정 책임자의 장기집권을 반대하고 나선다. 장기집권을 넘어 종신집권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우리 교회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 종신 집권제는 성서에 근거한 것도 아니며 그 체제에서 오는 여러 부작용과 문제점을 우리는 너무나 정확히 보고 있지 않는가! 이런 상황에서 어찌 그리도 당당하게 장기 집권 타도에 언성을 높일 수가 있는가? 부끄럽다.
물론 교회의 권리는 위에서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권리르 집행하는 목적은 집행자의 권리남용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데 있다. 그래서 우리교회의 권리는 가르치고 다스리고 지도하는 권리이다. 인권을 제대로 인식시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성서에 입각해 보호하고 육성시키는 권리다. 진리의 길을 제시하면서 잘못을 깨우쳐 주고 약한 자에게 용기를 주며 주님의 사랑을 알려주는 것이 교회의 권리다.「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주님」「병자에게 필요한 존재인 주님」은 교회의 권리행사의 표본이다. 이곳에 독재가 발붙일 자리는 없다. 때문에 교회의 권리집행을「봉사」라고 한다.
그런데 교회내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으면서 대사회적으로는 인권을 부르짖고 정의니 평화니 하며 타인을 규탄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주님이 가장 싫어하신 바리사이파 사람, 즉 위선자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물론 나는 여기서 가장 완전한 자라야만 남에게 충고할 수 있다는 원칙론을 무모하게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불완전하지만 완전한자 되도록 노력이라도 하는 자라야만 남의 잘못을 지적할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해야 하겠다. 반성하고 회개하는 자세는 늘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세가 앞설 때 그의 말을 비로소 권위와 힘이 있어진다.
그리고 우리 교회 내에 진정한 언론의 자유가 과연 보장되어 있는가? 물론 우리 교회법 어떤 조목에도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조목은 없기에 언론의 자유가 있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당국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말을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어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교회 안에는 무슨 협의회니 위원회니 하는 것이 많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자문 기관에 불과하다. 나는 이 모든 회가 다 의결기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자문기관이라도 좋으니 정말로 진지하게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자문을 다방면으로 받고 있는지가 의심스럽다는 말이다. 우리는 특히 평신도들을 교육할 때, 교회는 성직자들만의 것이 아니며 하느님 백성 모든 이의 것이라고, 따라서 모든 이가 자기에게 부과된 사명을 다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교회당국은 얼마나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받아들이는가? 평신도들의 의견을 교회행정에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가? 다만 교회당국의 의견에 찬의와 협조를 청하는 것만으로 끝내는 정도는 아닌가? 그리고 더러 이견을 제시하고 정당한 비판을 하는 평신도가 있을때 그를 백안시하지는 않는가? 만일 이렇게 된다면 여기엔 자연발생적으로 아부파가 생기기 마련이고, 집권자의 유아독존의 자세는 점점 굳혀지며 이는 곧 독재로 이어지는 파멸적 행정이 되고 말것이다. 언론의 자유란 이와같이 민주화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우리 이제 조용히 입을 다물자. 그리고「너」 를 향했던 손가락의 방향을 「나」의 쪽으로 돌려 우선 내 안의 뜰부터 정리하자.
이렇게 우리 교회가 독재, 독선적인 면을 개선해 나가고 명실공히 봉사의 자세로 나아가며,서로가 서로에게 건전한 비판을 용납하고 경청하는 언론의 자유를 실제적으로 누리고 산다면, 이 사회의 그렇지 못한 면을 요란하게 지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과 모든 단체의 본보기가 되어 그야말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위의 말들은 교회 저변에서 심심치않게 떠도는 말이기에 교구청을 떠나면서 교회만큼은 부디, 그들의 피켓을 세우고 부르짖는 구호가 공허한 메아리로 되돌아오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한다는 간절한 바람에서, 남아닌 내 가족에게 보내는 목소리로 몇마디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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