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함경도사람 가운데 백두산기슭 삼수갑산 출신이 한 분계시다. 삼수갑산이라면 함경도 땅에서도 제일 깊은 곳이요, 옛날에는 유배지로나 조금 알려졌을까 워낙 교통이 불편한 곳이어서 사람살이 여전히 불편한 고장이다.
태고적 원시림과 산이 사방에 흩어졌으니 대낮에도 맹수가 뛰쳐나올 만한 아득한 곳인 것이다.
이곳의 감자는 어찌나 큰지 베개 통만 한 것도 있어서 손님이 묵어갈 때는 이 감자를 베고 자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고장이 고향인 그분은 성격이 고지식하고 강직하여 한번 마음에 작정한일은 죽어도 실행하는 성미라 참으로 무서운 데가 있다.
70년대 초반 남북적십자회담이 있던 날부터 새벽마다 정한 냉수 한 그릇을 떠놓고 통일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 어언 20년 가까이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라든지 담배와 술을 다 끊은 일은 보통일이고 육신이 없는 부모의 무덤을 만들면서 자신의 엄지손가락하나를 삭뚝 잘라 어버이 영구대신 묻은 일과 같은 것은 다 특별한 성격으로 비쳐지는 일들이다.
6ㆍ25전쟁 때 아직 소년이었던 이분은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무작정 남쪽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눈이 한자나 쌓여서 얼어붙은 빙판길을 어머니가 쌀자루를 이고 쫓아오며 떠나는 아들을 전송했다한다.
그런데 그때 어머니가준 살을 여태 이분이 곱게 간직하고 있다. 떠날 때는 두어 말 되는 쌀이었으나 서울까지 오는 동안에 조금씩 먹다보니 겨우 이것이 남더라며 한 홑은 더 되는 갑산 쌀을 내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마다 또 고향생각이 날 적마다 이 쌀을 꺼내보며 40년 가까운 망향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면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분단의 세월이 이처럼 길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하였으랴.
이별의 세월이 이렇게까지 길어질 것을 알았다며 나도 두만강의 모래라도 한줌 떠갖고 왔을 터인데-그리하여 그것을 어루만지며 고향을 눈앞에 그려 볼 것인데 하는 안타까운 후회를 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북간도 연변에 사는 친구의 누이가 한국을 다녀갔다. 그분은 기왕 만났으니 서울에서 같이 살자는 동생의 제안을 다 물리치고『내 살던 곳 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겠누』하는 말 한마디 남기고 중국 땅으로 다시 떠나갔지만 다음에 남쪽을 다시 찾을 때는 그쪽 흙을 한줌 꼭 선물삼아 갖고 오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정다운 소리다.
얼마나 캄캄하고 안타까웠던 세월이었던가. 너무나 길고 지루한 40여년이었다. 이렇게 긴 세월을 서로 생사여부를 알지 못하고 살면서 그래도 의식불성으로 미치거나 절망해서 죽어버리는 일도 없이 목숨을 이어왔다는 것이 차라리 기구하게 느껴진다.
남북 쌍방 간에 엄중한 검열을 거치는 한이 있더라도 서신교환이나마 이뤄진다는 얼마나 다행스러울까. 하다못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짜만이라도 안다면 나는 마음이 조금 풀릴 것 같다. 어머니 나이 올해 99세이니 아직 살아있으리라는 생각이야 못하지만 자식으로서 저를 낳아 길러준 어미 사망날짜도 모른대서야 인간의 길이 아닐 터이다.
분단은 이같이 모든 인간다움의 길을 막는 것이다. 오가는 소식을 막고 정을 끊어놓으며 사람답게 살려는 인간의 근본 뜻조차 봉쇄해버리는 것이다
이 암흑, 벽, 깊디 깊은 강, 철책과 지뢰와 가지각색 어마어마한 무기와 핵, 독재와 외세와 식민지, 억압과 착취, 상호비방과 불신, 심화되어가는 동족간의 이질화, 우민화와 노예교육, 우상화와 학살 등 한 반도의 비극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동트는 새벽이 오기에는 아직도 완고한 밤이 더 버티고 있는 셈이다.
조성만군의 자결은 너무 안타까웠다. 너무나 측은하였다. 그리고 또한 너무나 아까운 목숨이었다. 어찌 그같이 깨끗하고 착한 마음은 스스로 육신을 칼로 에이고 시멘트바닥에 몸을 던져 산산이 부서져야만 하는가.
아까운 청춘, 보배로운 마음-우리는 순결하기 때문에 꽃처럼 진 조성만군을 주님 품으로 보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가슴에 가득 쌓이는 회한과 가책의 마음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 쓸모도 없고 용기도 없고 그러면서 비겁한, 썩을 대로 썩은 나 같은 기성세대들이 대신 죽어야하지 자네들 같은 보배로운 재목감이 하나씩 둘씩 자꾸 가면 어떻게 하다는 말인가, 조성만군이여.
자네의 죽음이 우리들에게 준 충격은 참으로 오래도록 우리의 가슴을 떠나지 않겠지만 자네가 남긴 말, 남긴 모습과 눈동자는 영원토록 우리 마음의 시가 되고 등불이 되고 믿음이 될 것이네.
조성만군.
통일이 되는 날 우리는 백두산 두만강 압록강을 향해 달리는 기차를 타고 군과 함께 가려네. 군의 어여쁜 모습을 안고 환희와 신생의 눈물을 쏟으며 달려가려네.
조성만군의 끓는 애국심과 그 일편단심을 결코 헛되이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순결한 그 정신과 용기를 거울로 삼아 민중해방과 통일투쟁에 가일층의 열기와 정성을 기울여가야 하는 것이다.
이 역사의 추진력을 감히 누가 막을 것이랴. 우리 6천만 민족이 한 덩어리로만 단결하면 어떤 세계사의 모순과 악순환도 능히 타개하고 우리의 영원한 자주독립을 지켜갈 수 있을 것이다
통일, 통일에의 열망은 결집되었다. 이제는 파죽지세로 온 민족이 통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일뿐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