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을 만들다보면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참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 경험이란 것이 즐겁고 흐뭇한 것보다는 속상하며 화나게 하는 것이 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곤 한다. 그래서 자주, 모든 것에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심정으로 훌훌 털어버리겠다고 결심하곤 하지만 소수의 기쁨이 다수의 속상함을 눌러주기 때문인지 아직도 자리지킴을 하고있고 여전히 짜증스러움을 벗지 못하고 있다.
요즈음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썰렁한 바람이 일고 있을 때 짜증스러운 경험의 도는 극치에 달하게 된다.
얼마전 지금까지 가톨릭신문의 기능으로 볼 때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이라고 지적받은 바 있는「컬럼」이 겁도 없이 게재된 적이 있었다. 기사 내용에 대한 찬ㆍ반의 견해는 있게 마련이고 특히 찬성보다는 반대의 반응이 극성을 부려온 터라 별로 겁먹지 않고 받은 독자의 강경한 항의는 거의 처음있는 일이라 쩔쩔맬 수 밖에 없었다.
교회 자체의 문제를 상당히 많은 부분에 걸쳐 제시한 그 고정칼럼을 읽은 즉시 전화를 한다는 그 할머니 독자는『나는 정치도 잘 모르고 교회도 잘 모르는 집에서 손주나 돌보는 보잘것 없는 사람』이라고 전제한 후『나는‥교회가 하는 것은 모두 다 옳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무조건 순명하는 것을 도리로 알고 있다』면서 『어떻게 교회신문에서 교회가 잘못했다는 얘기를 공공연히 게재할 수 있느냐』고 호통을 쳤다.
20년이상 신문을 구독해왔지만 이렇게 기분이 상하기는 처음이라는 그 할머니는『문제가 있으면 안에서 조용히 고치도록 조치를 취해야지 왜 누워서 침을 뱉느냐』고 격앙된 목소리로 거듭거듭 꾸짖었다.
비슷한 류의 질타를 여러방 맞고 멍청한 기분으로 있는 동안 이번에는 정반대의 전화가 사람을 혼돈시켰다. 40대 중반쯤으로 여겨지는 그 전화의 주인공은『언제 교회신문이 이렇게 발전(?)했느냐』면서 첫마디부터 칭찬을 했다. 그의 의도를 정확히 가늠하지 못해 머뭇거리는 동안 그는 다시 내용이 껄끄러워 욕을 많이 봤겠다면서 그러나『자신의 티를 볼 수 있어야 남의 잘못도 정당하게 나무랄 수 있는 것』이라며 문제의 기사를 게재한 결단을 치하(?)하는 것이었다.
극과 극을 이룬 이들의 반응에 일순 얼떨떨한 느낌이었지만 이들의 반응에서 모두 교회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없이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여타의 항의 전화처럼 기분이 나쁠수가 없었다.
문제를 보는 시각의 차이는 없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것이다. 그 시각의 차이는 단조로움과 편협에 빠질수 있는 범실을 다양함으로 조화를 이루어 극복케하는 묘약이 되기도 한다.
시각의 차이만큼 각자 생각이 틀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생각이 틀리니 표현 내용이 다를 것이고 그것이 바로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의 특성이자 특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 사람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한다면」아마 그처럼 재미없는 세상은 없을 것이다.
너와 나의 주장이 서로 다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생김새가 다른 것만큼이나 자연스런 일인데도 기사내용에 대한 항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 무너져 내리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어쩌면 그것은 전화의 내용에 담겨져있는 말의 종류나 색깔때문인지도 모른다.
불과 몇건 안되는 항의 전화의 대부분은 우리가 일상용어에서조차 꺼리는 언어만으로도 사람의 기를 죽이곤하는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과 반대의 견해는 모조리 틀린 것이라는 독선적인 표현을 쓰면서 신문사의 독선을 격렬히 규탄하는 독자에게 특별히 대답해줄 말은 항상 빈곤할 뿐이다.
그러나 우린 독자들이 쏟아놓은 말의 화살들이 가슴에 와 박히는 아픔이 있다하더라도 그 반응은 언제나 보석처럼 귀하게 여기고자하는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그의 비판과 그의 꾸짖음 속에는 신문을 샅샅히 읽고 있다는 증거와 함께 신문에 대한 애정이 바탕으로 깔려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없는 매질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지적한대로 그들이 선택하는 말의 종류는 곤혹스러움과 짜증을 벗을 수 없게 한다.비판 자체가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가 쏟아내는 말의 경직성이 짜증을 불러일으킨다는 얘기다. 때문에 그 비판은 다분히 알맹이가 있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수용을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보고 있노라면 너ㆍ나 가릴수 없이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어찌할 수 없기 때문인가.그 울화가 사람의 감정을 극단쪽으로 치닫게 하는 것인가. 그래서 벌컥 화를 내며 남겨두어야 할 마지막 말을 너무나 쉽게 선택하고 써버리는 경직성이 신앙인이라고 크게 다를바 없는 오늘의 교회 현실이, 교회가 이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이라는 말로써 변명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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