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슬프다. 거기에는 닥쳐올 수 있는 불행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불행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인간은 인생을 걸고 그것을 극복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어떤이는 태산같은 돈을 모았고, 어떤이는 막 강한 권력을 쟁취하였고, 어떤이는 튼튼한 체력을 길러 오래오래 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불행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으며, 배부른 부자들에게도 남을 호령하는 세도가들에게도 건장한 장사들에게도 왕왕 불행의 얼굴을 읽을수 있다.동물은 건강하고 먹을 것만 있으면 행복하지만 인간은 그렇지는 않다. 인간에게는 동에서나 서에서나 옛날에나 지금에나 불행의 그림자가 따라다녔으며 그것과 싸움을 하다가 인생은 끝나곤 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불행을 기피하고 행복을 추구한다. 우리의 선조들은 흔히 부귀, 다남, 강녕 등을 행복의 조건이라 생각했으며 부귀를 누려 남의 추앙을 받고 아들을 많이 낳아 가문을 번성케하고 건강하고 안락하게 사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식자들에게는 벼슬을 하는 것 이외에는 인생에 의미가 없었고 아들이 없으면 가문이 망하는줄 알았고 대중들은 늙고 병들기 전에 실컷 놀고 즐겨보자면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인간에게 이러한 세속적인 행복이 항상 보장될 수 없음은 물론이며 그러한 것은 왔다 갔다 하는 불안정의 가치였고 설령 그것을 오래 누릴 수 있어도 어차피 인생에는 종말이 오고 그와 더불어 인생의 즐거움도 허무로 돌아간다. 인생의 근본적 비애는 이승의 삶에는 한계가 있고 어떠한 화려한 영화도 허무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모든 것이 헛되다고 체념을 하기도 하고, 한 순간이라도 더 오래 살아보려 허우적거리며 발버둥을 치기도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연 행복의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聖書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축복받는 인생은 우리 선조들의 행복관과는 거리가 멀고 오해려 반대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세속의 부귀를 경계하여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가르쳤으며, 마귀가 산위에서 세상의 모든 영화를 보이면서 자기에게 절을 하면 그것을 모두 주겠노라고 했을 때에「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축복받는 인생은 당당하고 오만한 세도가가 아니고 초라하고 온유한 마음의 소유자이며, 호화롭게 잘먹고 잘사는 부유계층이 아니고 가난하고 슬퍼하는 하류의 계층이며, 세속과 타협하여 출세하는 약은 자가 아니고 정의에 굶주리고 목말라하고 그로 말미암아 박해받는 사람들이다. 결국 축복받는 삶은 부귀영화라는 종래의 지상목표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길은 마음의 평화와 영혼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그것은 부끄럽지 않게 떳떳하게 살아가는데 있으며, 그러한 삶은 양심과 정의에 바탕을 둔 도덕적인 것이어야 하고 양심과 정의와 도덕은 하느님의 법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개념이다. 부끄러운 것은 가난도 아니고 약함도 아니며, 머리가 나빠 공부를 못하는데에도 또는 운이 나빠 딸만 낳는데에도 있지 않다. 우리는 흔히 부귀한 계층에서 멸시할만한 비인간적인 작태를 발견하며 횡포와 악행으로 죄 없는 시민들을 못살게 학대한 자들은 대개 지능지수가 높은 자들이었다. 오히려 우리는 미천하고 어리숙한 사람들에게 순박하고 포근한 인간미를 발견한다. 인간에게 참으로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은 맑고 깨끗한 마음과 순결과 천금을 주어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지조일 것이며, 이에서 우리는 영혼의 자유와 마음의 평화와 불행으로부터의 해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왕왕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을 가치있는 것으로, 불행하고 가련한 인생을 부러운 것으로 착각함을 본다. 교양도 철학도 없는 속물들이 힘을 쥐고 횡포를 부리면 추악한 도덕적 열등자들이 X파리처럼 모여들어 아부를 한다. 그러한 자들은 세속의 영광을 위해서는 사탄에게도 절을 하고 타협한다. 그네들에게는 하느님이 무서울리 없고 자기 영달을 위해서는 지조를 판다. 이러한 멸시를 받아 마땅할 가소로운 속물들은 스스로를 축복받은 삶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남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고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면 그들은 일종의 자기도취증 또는 과대망상증에 걸린 장신병자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이처럼 흔히 교양보다는 야만이, 정의보다는 불의가, 양심보다는 속악이 높이 평가를 받고 있으며 돈과 힘을 하느님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오인하고 있다면 얼마나 미련하고 우스꽝스러운가.
우리가 살고있는 이 우주는 신비롭고 아름답기만 하다. 아름다운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이 창조되었다면 그리고 한떨기 이름 없는 꽃처럼 자신의 존재가 아름다운 우주의 일부임을 확인할 때에 우리의 인생도 아름다울 수 있고 신비로움을 확인할 것이다. 순박하고 깨끗한 영혼 속에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으며 그러한 영혼은 어린이의 티없는 천진한 눈매에서도 청순한 젊음의 미소에서도, 이웃에 인정을 베푸는 어른들에게도 발견된다. 우리는 인간의 선행과 순수한 희생을 보고 따뜻함과 포근한 정을 느낄 수 있으며 도덕적 위기에서 구제되는 영혼을 보고 흔히 공감의 눈물을 흘린다. 인간은 이러한 눈물을 흘린다. 인간은 이러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한 아름답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미천한 인생이더라도 따뜻한 인정이 넘칠때에, 청순한 남녀가 깨끗하고 떳떳하게 사랑을 할 때에 있는 자는 없는 자를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사랑으로 도와 줄 때에 거기에는 아름다움이 있고 눈물이 있고 뭉클한 정이 있고 흐뭇한 가슴이 있다. 이러한 인간성을 볼 때에 아름답고 신비롭고 감사하기조차 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발견할 것이다.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길은 평화롭게 자유롭게 사는 것이다. 평화와 자유는 악과 불의의 사슬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선과 정의는 도덕성이고 그것을 불행에서 구제할 수 있는 길은 도덕성과 인간성의 회복이며 그것은 사랑과 인정이 오고가는 인간관계에서만 가능하다.
※지금까지 수고해주신 김종민 교수ㆍ박종대 교수ㆍ이경우 신부ㆍ김몽은 신부께 감사드립니다.
이번호부터는 권영규 교수(영남대영어영문학과), 서정수 교수(한양대문과대학장), 박완서(작가)
조철현 신부(광주 가톨릭대교수)順으로 집필해 주시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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