ㄹ에게
주님 안에 많은 성장이 있으리라 믿으며 예수성심을 헤아리는 인사를 보냅니다. 특별히 사람의 온전함을 위하여 병자를 치유하고 소경을 보게 하며 차별받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접하고 우는 자를 위로하며 억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나날의 삶을 엮어가는 ㄹ과 ㄹ의 가까운 벗들에게도 같은 인사를 보냅니다.
오늘 ㄹ에게 편지를 쓰기로 한 것은 그동안 격조했던 답장도 쓰고 격동하는 사회현상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고 ㄹ과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ㄹ과 ㄹ의 벗들이 또 그의 젊은 학생들이 가끔『제도교회 물러가라』는 말을 하곤 해서 한번 이를 숙지해보고 싶습니다. ㄹ과같이 한 신앙인으로서, 제도교회의 한 공인으로서 크게 자성하며 함께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특별히 지난번에 ㄹ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오인들의 신앙생활이 너무나 개인적인 경향으로 흐르는 것 같이 아니냐고 질문했던 것에서부터 출발합시다. 물론 어떤 개인이 신앙을 수용하는데 있어서는 개인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생활화할 때에는 결코 개인적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구원관은 어디까지 공동체적인 구원관이지 개인적인구원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앙생활이 개인적이다, 사회적이다 라고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개인을 떠난 사회란 있을 수 없고 사회를 떠나서 개인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이 사회를 떠나서는 살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사회적 오류를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회란 개개인의 함에 불과하니까 사회의 문제는 개개인의 잘못을 제거하면 자동적으로 고쳐진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몰고가 신앙생활을 개인의 구원관에 국한시킴으로 사회적으로 큰 오류를 범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아무리 선하고 올바르게 사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개인들이 모였을 때 생길 수 있는 조직악의 가능성을 쉽게 간과해버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개인에게 국한되어 개인성화에만 힘쓴다면 그리스도교 신앙들이 많은 곳 일수록 구조악이 은근히 정당화 되고 구조악에 기초한 권세는 계속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구미의 노예 제도를 생각해보시고 구미의 전세대의 식민제국주의를 생각해보십시오. 남미의 여러 나라 현 상황을 생각해보시고 현재의 필리핀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개인구원 위주의 신앙관 하에 이루어졌던 사회 및 정치 구조의 결과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신앙은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서서히 번지며 개인과 사회를 함께 변혁시키는 인간화(하느님의 모상 찾기)의 힘이 되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19세기기에 마르크스가 영국에 쫓겨가「자본론」을 썼습니다. 당시 영국노동자들의 참상을 보고 굉장히 격분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그 당시 영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부녀자와 어린이 노동자들의 비참한 노동현장, 착취 현상을 보고 이를 비판하여 초기 자본주의적 폐습을 예수님의 정신으로 고쳐 나갔다면 마르크스는「자본론」의 집필을 그만두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공산주의와 같은 폭력주의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안일과 태만, 대사회적인 안목의 결핍 때문이라면 너무 심한 자책일까요 교만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사랑과 공감력으로 눌리고 배고프고 병들고 우는 사람들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공산주의라는 허위의식이 이들 안에 스며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ㄹ이 「제도교회 물러가라」고 외치는 것도 알만합니다.
그러나 개인 구원의 안일 속에서 무디어진 나날을 보내며 남에게만 대사회의식을 강요하는 것이 ㄹ과 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ㄹ과 내가 사회의 폭력을 오히려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지면을 통하여 ㄹ과 내가 분명히 하고 지나가야할 문제가 있습니다. 1970년대 이후 도시빈민 사목이라 하여 몇몇 사목자들이 재개발지역이나 도시빈민촌에 들어가 그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며 그리스도인공동체 형성에 노력하고 있는 것을 ㄹ도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부 당국에서는 그리스도인(평신도, 사제, 수도자)들의 활동이 공산주의적 행동이라고 규정하여 그들의 활동을 제약하고 주위에게 이러한 여론을 퍼뜨려 곤욕을 치루는 것을 ㄹ도 나도 여러 번 보았을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불행한일이요 심각한 착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서민들과 함께하고 봉사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폭력을 동반한 공산주의라는 허위의식이 침투할 수 있는 길을 막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교회의 정치와 입니다. 어떠한 사회든지 정치화 혹은 행정화 되어 비정치적으로 남아있어야 할 분야까지 정치권력의 입김이 들어가게 되면 종교마저도 정치화될 위험이 있습니다. 정치화가 철저히 된 사회를 우리는 전체주의라고 부릅니다. 나치하의 독일을 생각하면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전체주의적 구조 하에서 신앙인들은 정치적 문제 속에 있는 인간문제, 문화의 문제, 종교의 문제를 정치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된 주원인은 정치적 구조에 있기 때문에 체제비판이라는 것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화려한 제왕의 권위 속에 자리하고 있는 헤롯왕의 여우됨을 갈파하시고 비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메시아 콤플렉스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또한 훌륭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숙고해 보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하여 제도교회라는 명목으로 젊은 열기에 간단히 매도하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저 팔레스티나의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돌아가서 허위의식을 훌훌 떨쳐 버리고 우리의 역사를 이 현장에서「나됨」으로 그리고「우리 됨」으로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ㄹ이 질타하는 제도교회가 보다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교회로 변화할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나라 정치ㆍ사회ㆍ교육제도가 비인간화로 치닫는 구조에서 벗어나 자율적이고 창조적이며 협동적인 사회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기를 소망해 봅시다. ㄹ과 ㄹ의 친구들의 건안을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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