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부딪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은 모두 하나의 물음으로 연결된다. 이를테면「어떻게 살 것인가?」「왜 사는가?」등과 같다. 그런데 좀 진부한 감은 없지 않으나 워낙 어려운 문제이면서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을 어떤 사람으로 길러야 되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지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마음을 다스리는 글』에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복은 검소함에서 생기고 덕은 겸양에서 생기며 지혜는 고요히 생각하는데서 생기느니라. 근심은 애욕에서 생기고 재앙은 물욕에서 생기며 허물은 경망에서 생기고 죄는 참지 못하는데서 생기느니라 등.
그렇게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또 걱정이 된다는 것이다. 검소하게 살려고 하니 화려함이 유혹하고 겸양함을 행위의 지표로 하자하니 남들이 알아주지 않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드니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하는 말이 어쩌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일간지에 고교생의 자살기사가 났다. 사람에게 여려가지 일들이 닥치지만은 가장 확실한 것이 죽는다는 사실임을 모르는 바라 아니다. 그러나 그 죽음에는 유달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을 생각하게 했다. 경쟁이 있는 곳에 준비가 있는 법이고 준비를 할 바에야 철저히 해야 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이야기다. 나타나는 몇 가지의 현상을 보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 그것을 바로잡아 증상을 고치는 방법도 있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건전한 방향으로 돌려 불합리한 것은 자연적으로 줄어들게 하는 방법도 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방법은 마음을 다스리는 글속에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갖기 위해서 어떻게 교육하여야 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먼저 가정교육의 주체인 부모가 자녀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점을 살펴보면 가정교육의 목표로 의무와 책임을 다하면서 자유를 향유하는 사람을 길러낸다는 데 두고 사회 국가라고 하는 공동체 속에서 개성을 갖고 사는 사람, 건전한 신체의 성장에 따른 자기애, 어려움을 극복할 줄 아는 강한 의지, 생명을 근원적으로 경외할 줄 아는 사람으로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목표를 위하여 자주성을 기르는 교육, 사회성을 기르기 위한 교육내용이 가정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교육은 조여붙이는 교육이 아니라 보이는 교육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부모들의 성실한 모습을 보고 자녀는 성실하게 살게 된다는 것이다. 외형적으로 나타난 형상이 성실하게 보이더라도 부모자신이 알고 있는 솔직한 심정은 그것이 성실이 아니었다고 생각할 경우가 많다. 그것이 위선이고 그것이 욕망충족을 위한 자신의 질서를 잃은 몸부림이었다면 자녀들에게 의미를 심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모들은 자식교육에 있어서 순수하고 솔직해야 한다. 어린이가 누구의 삶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살 길을 작정하겠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너무 명확하다. 그 부모의 모습인 것이다.
다음 학교교육에 대해 조금 생각해보면 학교는 사회 속에 있는 작은 사회다.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하여 높은 담을 쌓아올려도 이제 견딜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학교가 가고 싶은 곳이라야 하고 공부가 싶어야지「억지춘향이」격으로 그저 숨 막힐 정도로 밀어붙여서야 되겠는가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학부형 등쌀에 학교장의 교육철학이 쇠진해지고 사회분위기 등쌀에 학부모의 열이 오르게 되니 학교가 단독으로 문교부가 단독으로 정책을 이렇게 저렇게 할 수도 없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노력에 의하여 해결해야 한다. 무책이 상책이라는 역설적인 태도로 시간을 그대로 흘러 보낼 수도 없는 일이다. 인간교육에 중점을 두어야한다. 하지만 그것은 대학입시에 출제가 안 되니 딱한 노릇이다. 요즈음 학교교육이 모두 입시준비를 위한 체제에 돌입했다. 아니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한치의 여유도 없는 절박한 상황만 전개될 뿐이기에 어떤 다른 의미가 끼어 들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풀어야 한다.
학벌에 따른 임금이 차를 줄이고 기능보유자에게 우대를 하며 날들로부터 빈축의 대상이 되는 모난 사람은 살기 힘들게 될 뿐 아니라 힘껏 자기 일을 하고 남과 더불어 사는 사람을 만드는 교육이어야 한다.
사회교육 중 중심이 되는 종교교육에 대하여 살펴보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만큼 실제로 높은 비중을 두고 있지 않은 것이 주일학교 교육이 라고 하겠다. 주일학교 교사에게 봉사만을 요구하고 있는 사실만 보아서도 대략 짐작이 된다.
교회가 하는 일이기 때문에 신도는 당연히 해야 한다는 논리가 합리적인 것 같지만 그렇게도 않은 면도 있다. 교형자매의 귀여운 자녀들의 종교교육이 그들을 영생으로 인도하는 안내라면 어떤 형태의 교육보다 중요한 것이다. 유치원교육은 가장 우수한 사람이 맡아야한다는 논리가 바로 주일학교 교육에도 적용되어야할 것이다. 그 교육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는 종교교육은 지식을 주입하는 것과는 달라야한다. 그리고 학교에서 실시하고 있는 것들의 단순한 반복은 오히려 주일학교에 대해 싫증을 갖게 한다. 주일학교가 그런 면에서는 정규학교 교육에 미치기 힘들기 때문이다. 유희도 하고 레크레이션도 좋다. 그러나 분위기는 기도하는 경건한 곳으로 모아야한다. 종교는 생활이지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쿵저러쿵 늘어놓기만 하다 보니 머리가 더 무겁게 느껴진다.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주여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뿐인 것 같다.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해야 올바른 예배가 된다」(요한4, 22)는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르기 위해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마음을 다스리는 글도 모두 하느님의 가르침 속에서 정리된 것이며 그것이 가정 학교 교회교육에서 실제 이루어질 때 바른 길을 찾아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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