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교회의는 한국 천주교회 사목지침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규정」만은 이미 교황청의 인준을 받아 한국의 지역교회법으로서 효력을 낸다고 했다. 전문 12조로 되어있는 이 규정들은 사제들로 하여금 법 규정으로서 준수하도록 되어 있다.
이 규정들을 보면서 제일 먼저 받는 인상은 그 내용이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사항들이라는 점이고, 다른 또 하나는 일반 법 규정에는 반드시 범법에 따른 제재규정이 있는데 이 규정에서는 그런 제재규정 같은 것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사제들이 일반인과 달라 고도의 신앙과 교양을 겸비한 분들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자각에 신뢰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주교단은 자율에 맡겨도 될 만한 일을 준수 법규로 규정한 것은 그만큼신뢰만 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 같다. 이제 규정들의 내용을 우려의 측면에서 그 표현을 바꾸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사제들은 축성되고, 하느님 신부의 분배자요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도록 선택된 지위에 속하는 만큼 신분과 지위에 상응한 교양과 덕성을 갖추어야함은 말할 것 없거니와, 왕왕 그러한 신분을 망각하거나 지위에 상응한 덕성을 갖추지 못한 사제들이 있음을 우려한다(제1조).
사제라면 누구보다도 기도하는 사람 영성적으로 탁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감화를 줄 수 있어야 하는데 기도하는 모습도 볼 수 없고 영성적 감화를 주지 못하는 사제들이 있으니 곤란한 일이다(제2조). 사제라면 누구보다도 자기직무에 충실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데 쓸데없이 자리를 지키지 않고 제자리를 번번이 비우는 사제가 있다면 신자들의 신뢰를 어떻게 받을 수 있단 말인가(제3조). 사제는 누구보다도 자기 성찰을 하고 독선을 지양하고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의 삶을 살기위해서 영성수련에 적극적이어야 하는데 그러한 삶에 무관심하다면 어떻게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겠는가?(제4조) 사제는 하느님의 진리와 복음을 가르치는 사람이기에 부단한 공부를 하여야함에도 공부는 하지 않고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만 가지고 산다면 어떻게 강론이나 영성지도를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제5조) 사제는 사목을 위한 공인이고 봉사자이기 때문에 정당한 휴식은 취해야하지만 휴식의 명분으로 돈과 시간을 낭비한다면 어떻게 절제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제6조). 직무에 충실하고 열성적인 사제라 해서 자기건강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것도 현명한 처사라고 말할 수 없다(제7조). 사제라면 성무집행에 있어 전례에 상응한 성스러운 전례복을 갖추어야함에도 속된 옷차림으로 전례행위를 한다면 어떻게 성스러운 전례를 집전할 수 있겠는가?
또 사제는 신분과 지위가 세속인과 다른 만큼 평상시는 물론 더욱 공적인 활동에 있어 사제다운 복장을 해야 함에도 세속적인 복장을 한다면 어떻게 그 품위를 지킨다고 하겠는가? (제8조) 사제는 세상의 가치를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인만큼 생활자세가 검소하고 교양이 있어야 하는데 사치한 생활을 추구하고 교양 없는 자세를 취한다면 누가 그런 사제를 존경하고 따르겠는가?(제9조) 사제는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고 하느님께 봉헌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 독신생활을 선택한 사람인데도 여성문제로 의심을 받거나 의심받을 행동을 한다면 신자들의 신뢰를 어떻게 받겠는가?(제10조) 특히 사제관에 젊은 여성을 두고 한집에 살거나 인사이동 때 식모를 데리고 다닌다면 독신생활의 위험은 물론 이고 신자들의 신뢰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제11조) 사제는 성직에만 충실하기 위해서 성직에 맞지 않는 일체행위는 금해야 하는 법이다. 국가의 공직을 맡는 일, 정치활동, 돈벌이, 남의재산관리, 돈을 꾸거나 꾸어주는 일, 보증서는 일, 의료행위, 결혼중매 등은 성직생활과 절대로 맞지 않으니 이런 것들은 절대 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은 주교단의 사제들에게 바라는 요망이요 당부이다. 또 한국의 사제상의 제시라고도 볼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은 하느님 백성인 신자들의 간절한 바람과도 일치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왕 이러한 규정을 결정할 바에는 이밖에도 좀 더 보탤 것이 있는데 그 빠진 점에 아쉬움을 느낀다. 몇 가지 부연한다면, 사제들은 보편교회의 사제로서 교도권에 충실하고 개인의 주장을 가르치지 말고 교회의 같은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
개인적 사상이나 취향을 교회의 가르침으로 뒤바꾼다면 하나의 교회를 위태롭게 만든다(제13조). 사제들은 하느님 백성에게 일치의 상징이 되어야한다.
주교와 사제단의 일치, 사제단 안에서 질서와 사랑의 일치를 구현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일치의 교회, 친교의 교회모습을 증거 할 수 있겠는가(제14조). 사제들은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 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사제는 가진 자나 못가진자, 지지자나 반대자, 여당이나 야당 등 어떠한 사람에게도 중립적이고 초연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한쪽만을 편들 때는 한쪽은 잃는 것이 되고 만다(제15조). 이세가지 규정은 한국적상황이나 체험으로 보아 꼭 추기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끝으로 이번 이 규정들이 주교단의 단순한 권고안으로서 사제들에게 제시됐다면 모르되 그것이 법 규정으로 제시된 만큼 만일 이 규정들을 따르지 아니할 때 어떻게 되겠는가 우려된다. 사제들의 고도의 양식을 믿는다 해도 만의하나 어긋날 때 이에 대한 대책이 없다면 규정의 권위는 손상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러한 기우가 헛된 것이 되도록 사제들의 현명한 수용 자세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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