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탄생시부터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고난으로 연속된 생애를 마치셨다. 그분은 왜 막강한 권세와 온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위용을 갖춘 모습으로 부귀와 공명을 떨치면서 세상에 군림하지 않으셨을까? 왜 한번쯤은 물리적 힘으로라도 당시의 강자를 꺾고 세상을 제압하여 모든 백성을 권력과 힘으로 지배함으로써 그 서슬이 퍼런 권세와 위엄앞에 모두가 오금을 못펴고 머리를 고아리며 굴신복종하도록 강요하지 않았을까? 만약 예수님께서 무서운 폭력을 휘두르고 살인도 불사하는 독재자로 군림했다면 그 당시 예수께 잘보여서 한자리 얻어보려는 출세에 눈먼 무리들로부터는 비굴한 추종을, 쓸개빠진 아첨배들로 부터는 실없는 허위존양을 받았을지언정, 역사와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여 온 인류의 마음에 구세주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을 가까이서 뵈올 수 있게 되었고 그 분은 우리와 친교를 나눌수가 있게 된 것이다. 가난한 자들이나 병자들과 죄인들 까지 어느 누구라도 그 분을 주님으로 친근하게 부를 수 있고 사랑을 느끼며 신뢰와 존경심을 갖고 따를수 있는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요한 14,6) 그분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폭력과 악법으로 민중을 내리누르는 통치자(마태20,25)도 아니시고 백성을 기만하는 정치 사기꾼은 더욱 아니요 재물을 은닉하고 부정축재로 욕망을 채우는 분은 더더욱 아니요 우리들처럼 가난한 자로 사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섬김을 받으러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마태20,28)
그리스도께서는 폭력 앞에 비폭력으로 차라리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이 되셨으며, 선으로 악을 이기셨으며, 사랑으로 증오를 축출하셨다. 복수를 엄단하신 분이시지만 끝내 세속의 권력자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무참히 죽이기까지 했다. 그리스도는 죽음마저 받아들임으로써 죽음를 이기고 부활하시어 영원한 생명의 승자가 되셨다. 그리하여 그 분의 사랑의 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송두리째 차지하게 되셨고 사랑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인간 구원을 이룩하신 사랑의 완성자가 되셨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때문에 우리가 받아야 할 수치와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신 것이다. 암담한 이 시대와 억눌림을 당하는 민중을 위하여 교회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 예수께서는『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살 것이요』(루가 9,23~24)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앉아서 현세의 복을 빌고 내세에 천국가기를 기원하는 기복의 집단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가난하게 살고 고난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교회이어야 한다. 우리의 현실은 백성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교회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와 십자가의 참 뜻을 도외시한채 단식과 금육을 매일하고 철야 기도와 고해 영성체를 자주하고 매일 십자가의 길 신공을 드리는것으로 그친다면 형식적 신앙에 기울어 지지 않겠는가? 주 야훼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어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앞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앞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들에게 나눠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하는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체 하지 않는것이다』(이사 58,6~7).
십자가의 죽음은 인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생애의 절정이다. 사랑은 그분의 삶의 전부요 의의이며 십자가는 사랑의 극치이며 완성이다. 지금은 이론적인 정통교리(Orthodoxy)와 입으로만 사랑을 외치는 때가 아니라 신앙과 양심을 행동화하는 정통행위(Ortho-Praxis)를 요구하는 때이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이다』(야곱2,26).
우리는 시대에 비추어 너무 안일과 무사주의에 젖어 해이해 지고 속화되어 자기 기만에 빠져 있지 않는지?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人)이되기 위해서는 그 분의 가르침의 핵심인 사랑의 실천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신을위한 일로 갖은 비난과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 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복음을 생활화하고 신앙과 양심에서 우러나온 정의로운 행동 때문에 비난과 고통을 당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요 그리스도인의 명예이다(마태5,10~12).
『여러분이 그리스도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행복하다. 영광의 성령 곧 하느님의 성령이 여러분에게 머물러 계시기 때문이다. …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면 부끄러워 하지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십시오』(I베드4,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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