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들춰본 영성지에서 종철군 어머니와 세진군 어머니의 대담기사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사진에는 두 어머니의 눈에 그렁하게 맺힌 눈물까지 여실히 나와있어 가슴 속에다 아들을 묻은 어머니의 단장의 슬픔이 생생하게 와 닿았다. 그러나 가슴이 그렇게 철렁했던 것은 슬픔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분노가 더 걷잡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분들, 특히 종철이 어머니를 대답에 응하게 하기 위해 싶은 상업주의의 잔혹성 같은 것에 대한 노여움이었다. 그 난리를 친 49재도 되기 전에 마련된 대담일 것을 생각하면 더욱 가슴이 아팠다. 우리가 편하게 해주고 위로해 줘야할 것은 세진이, 종철이의 영혼뿐 아니라 살아있는 유족의 마음도 아닐까. 그 방법은 그들이 당한 무섭고 억울한 고통을 잊지 않는 일이고, 함께 하는 일이고, 입장을 바꾸어 내가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이웃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걸 그들에게 해주는 일일 것이다.
물론 잡지사에도 그런 기사를 기획했을 때 상업주의만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을 줄 안다. 우리 모두가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그분들이 심중에 묻어둔 말 한마디를 듣기위한 소망과 사명감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런 센세이셔널한 기사처럼 망각을 부채질하는 것도 없다.
한 달만 있으면 같은 난에 탤런트의 이혼 고백이 나올지도 모르고 디자이너와 코미디언의 칼라 대담이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뭏든 그 난을 메꾸어야 할 책임을 진 사람은 이달의 기사보다 충격적인 화제가 될 기사거리를 찾고 싶은 직업적인 욕심 때문에 계속 뛰어야할 것이다.
읽을거리, 볼거리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런 욕심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피해는 무슨 일만 났다하면 그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해결하려는 노력보다도 더 큰 사건을 터트려, 앞서 일어난 사건을 지워가는 식의 정부 당국의 해결방법한테 당하는 피해 못지않아 우리는 차츰 뒤끝없는 건망증 환자가 돼가는게 아닐까.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건 너무 악의적인 해석이고 실은 그 고통받는 어머니들이 못다한 말로 서로를 위로하고 우리의 안일한 의식을 두드리게 하려는 좋은 뜻이었다는 것 또한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종철이 아버지가 외친 『내 아들은 못된 놈이고 이 세상에선 똑똑하면 못된 놈 아니더냐』는 절규가 주는 충격에 의미도 채 삭이지 못한 터이다. 나는 아직도 그렇게 짧고 무섭고 진실한 절규를 들어본 적이 없다. 다른 어떤 말도 그 말처럼 정확하게 우리가 처한 현실과 이 시대의 어버이 노릇의 고뇌를 함께 꿰뚫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누구나 무심히 입에 올릴 수 있는 흔하고 쉬운 말이 전율스러울 정도의 진실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종철이 아버지가 바로 그 비통스러운 자리에서 했기 때문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박종철군 사건을 전후한 혼란스런 시기에 있었던 김수환 추기경님의 여야 정치인들은 우선 마음을 비우라는 말씀도 정말 값지고 적절한 충고의 말씀이었다.
국민의 이름을 빌지 않고도 국민적 여망을 두루 담고있는 크고도 준엄한 말씀이어서 누구나 겸허하게 받아들이길 얼마나 바랐던가. 그러나 속 검은 사람들은 마음을 비울 생각은 안하고 그 말씀만 빌어다 쓰고 있다. 서로 마음을 비우라고 하기도하고 비웠노라고 뽐내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 도처에서 마음을 비운다는 말이 대유행이다.
같은 말이 하는 사람에 따라 어쩌면 그렇게 다르게 들릴 수가 있는지. 추기경님의 말씀이 감동스러웠던 것은 그분의 나라와 시국 걱정이 거짓 없는 진실이었고 그 분의 마음에서 욕심이나 계략을 먼저 비운 상태에서 하신 말씀이었기 때문인 것을. 그저 하기 좋고 듣기 좋다고 마음속에 욕심과 음모만 지글대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따라하니 마치 흉기를 뒷짐져 감춘 도둑이 남의 집 문소리처럼 가소롭게 들릴 뿐 먹혀들 리가 없다.
마태오 복음 5장부터 7장에 그 유명한 산상설교의 마지막은 이렇게 되어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의 가르치심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가 있기 때문이었다』
요새처럼 말의 권의가 떨어지고 함부로 임자와 뜻이 바뀌어 마냥 천해지는 때에 정녕 그리운 말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엔 왜 권의가 있었을까. 그건 그 분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 분의 완벽한 인격과 하느님과 일치를 이룬 신격(神格)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 것을 그 말 자체에 절로 귄위가 붙어있는 줄 알고 너도나도 제 이익을 위해 아전인수 할 때 써먹으니 탈이다. 성경말씀은 워낙 자상하고도 무한하여 티끌만한 잘못도 걸리게 돼있지만 태산같은 잘못도 변명할여지가 있게 마련이다. 전체적인 큰 뜻을 헤아리기 전에 토막토막 떼어 내어 써먹으려면 그야말로 쓰는 사람 심보에 따라 제멋대로 뜻을 바꿀 수가 있다.
실상 토막토막까지 따질거 뭐 있나. 가증 큰 뜻인 사랑조차 사랑없는 사람의 목청을 울리고 사랑없는 세상을 횡행할 때 얼마나 스산하고 역겹게 들리는가.
主여, 이 글을 쓰면서 품은 제 앙심을 용서하소서.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