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전 TV에서 방영된 가상(假想)드라머「그날 이후(The Day After)」가 악몽처럼 떠오른 주말이었다. 바쁘게 돌아가던 도시들, 각자 가기 일에 몰두하며 생동감 넘치게 일하던 사람들이 번쩍이는 성광과 함께 일순간「정지 상태」에 들어간다. 곧이어 구름기둥(핵우산)이 치솟고 세상은 온통 불바다를 이룬다. 지옥의 모습이다. 마천루들이 맥없이 무너져 내리는가 하면 사람들은 시뻘건 불길 속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숯덩이로 변해버린다. 결국 지구는 어두움 속에 갇혀버린 채 영원한 침묵 속으로 빠져버리고 만다. 이른바 핵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핵전쟁의 위험성을 경고하기위해 제작된「그날 이후」는 당시 TV를 지켜본 수많은 사람들을 충격 속에 몰아넣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철저히 파괴당하는 모습은 참으로 처절한 장면들로 아직도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가해자격인 미국은「비극적인 실수」로, 피해자인 이란은「고의적인 학살」이자「테러」로 각각 규정하고 있는 가운데 이란 민간여객기의 참사사건은 이란의 對美 전면전(全面戰)선언으로 비상 국면에 접어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질 수 있었을까.
16명의 승무원은 포함, 2백 90명의 무고한 인명이 졸지에 희생 제물로 사라진 이란 항공소속 A300여객기피격사건은 민간 항공기에 대한 군사적 공격으로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낸 사건으로 기록되게 됐다. 더구나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이 엄청난 사건을 저지른 장본인이 바로 「미국」이라는 사실이다.
서방 세계의 대표적 국가로 또는 대부로서 버티어온 미국의 이미지는 이번 사건으로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입은 셈이 됐다. 강력한 인권 수호국으로 인도주의적 입장을 표방해온 미국으로서는 그 역할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제기 속에서 실로 엄청난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66명의 어린생명이 포함된 모든 희생자들의 어처구니없는 죽음 앞에 삼가조의를 표하면서 그들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는 결과로 드러나기를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모든 전쟁의 종식이다. 하루도 쉴 사이 없이 이어지는 모든 종류의 전쟁ㆍ분쟁ㆍ폭력ㆍ테러행위를 즉각 중지하고 잃어버린 평화를 되찾는 일이다.
이미 모든 매스컴이 한결같은 자세로 논평했듯이 민간 여객기에 대한 공격행위는 어떠한 이유로든지 용납될 수 없다. 때문에 미국은 이번 사건이 자신들의 주장대로「책임을 다한 비극적인 실수」또는「정당방위가 빚은 실수」였다 하더라도 피해 당사자들은 물론 피해국에 대해 진심어린 사과와 함께 최선의 보상책을 즉각 마련,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 엄청난 사건이 단지「실수」였다면 더더욱 그래야함이 마땅한 노릇이다.
이미 베트남전에서 드러나 버린「잃어버린 도덕성」이지만 더 이상 그 도덕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 미국이 취해야할 조처는 너무나 확연하다. 피해당사자인 이란 역시 한시바삐「이성」을 되찾는 일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물론 무고한 인명을 무참히 빼앗긴 그 아픔ㆍ상처는 쉽사리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83년 9월, 같은 비극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피해자가 겪는 아픔과 분노를 누구보다 실감하고 있다. 뉴욕을 떠나 서울로 오던 대한항공 007여객기는 당시단한번의 사전경고도 없이 소련전부기의 무차별 공격으로 공중분해 됐고, 그 참사는 아직 우리의 아픈 상처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소련은 국교수립만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전시상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10일이라는 시일을 허비한 후에야 피격사실 시인과 함께 사망자에 대한 극히 의례적인 유감의 뜻만 표명했었다. 참사를 저지른 당사자들로 책임 있는 발언, 그에 따른 성의표시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호르무즈 해협에서의 이란민간항공기 피격 참사가 몰고 올 파문은 사건발생 초기부터 예상됐지만 對美 전면전을 선전포고하고 나선 이란측의 초강경 대응자세는 이 같은 우려를 뚜렷이 예견케 하고 있다.
그동안 호르무즈해협을 중심으로 펴온 이들 쌍방의 지역전만으로도 이미 당사국들은 물론 여러 나라가 피해를 입었고 손실된 유조서만도 3백척이나 된다고 한다. 유조선의 손실은 또 그렇다 치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고귀한 인명이 목숨을 빼앗겼는지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실정이다.
바로 얼마 전 이란에서 가스정유소를 건설하던 한국인근로자 13명이 이라크 공군기폭격으로 어이없이 희생당한 사건을 비롯, 우리도 심심치 않게 쌍방공격의 희생제물이 되어오지 않았는가.
이란측 주장대로 미국이「고의로 저지른 사건」으로 단정 짓기에는 사건 후 야기될 미국의 입장이「불을 보듯 환한 일」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약해진다. 현재 강력한 의문으로 제기되고 있는 몇가지 문제점 ▲미국의 빈센스호가 여객기와 F14기를 구분하지 못했다가 사실 ▲이란여객기가 교전지역에서 필요이상으로 고도를 낮춰 운행한 점 등은 조사를 통해 드러나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 같은「실수 아닌 실수」가 또다시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란이 전면전을 선언하고 나선 이 시점에서 이는 단순한 기우를 넘어서고 있다. 이번 사건을 지켜보면서 가상 드라머「그날 이후」를 떠올린 것은 자연스런 과정이 아닐 수 없다.
작은 불씨 하나가 일으킬 수 있는 연쇄반응의 효과는 엄청나다. 그 불씨를 잡는 노력은 지금 당장 서둘러야한다. 자국의 이익이 걸려있든 아니든 전쟁의 종식은 세계인 모두가 함께하는 노력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세계평화를 위한 노력에 교회의 역할은 핵심이 되어야할 것이다. 평화의 왕을 주님으로 모시는 크리스찬의 사명은 이제 전쟁을 종식시키는 일에 집약시킬 필요가 있다. 평화가 지켜지지 않는 책임은 전세계에 산재한 무수한 교회나 신자들이 먼저책임을 통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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